<김명열칼럼>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파란 하늘아래서 울굿불굿한 주황색과 노랑색의 자켓을 입혀주던 가을이 이별을 고하고 나의곁을 떠나갔다.
떠나간 가을과의 이별이 서러운듯 한줄금의 가랑비가 머리카락을 적시며 이마와 눈동자밑으로 방울 방울 흘러내린다.
마치 누가 이 모습을 본다면 영낙없이 떠나는 가을과의 이별이 서러워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다.
한동안 우리곁에 머물면서 낮에는 따사한 햇볕으로 오수에 잠든 나의 몸을 따듯하게 덮어주고 밤에는 귀뜨라미를 불러 자장가를 불러주었던, 그렇게 동거동락하며 친하게 지냈던 가을이, 이제는 소리없이 낙엽으로 길을 덮으며 시간과 세월의 덧없음을 탓하지 않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겨울을 준비한다.
이제서보니 가을은 화려한 옷을 벗고 시간과 계절의 한 마디를 정리할줄 아는 겸허한 자세로 작은 미련까지도 거두는 가을을 생각하니 정말로 정직하고 위대하다. 여름내내 두터운 외투처럼 무겁게 걸쳤던 온갖 이파리와 열매 같은 장신구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제 몸이 얼마나 가볍게 비웠는지, 툭툭 발길에 차이는 자신의 옛날 분신들을 의식하지도 않은채 몇차례 찬 비와 바람을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그렇게 소리없이 슬슬 꼬리를 내리고 떠나가 버렸다.
계절이 바뀌고 오가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마는 겨울이 온다는 것이 어쩌면 내 인생의 겨울이 오는 것 같아 더욱 쓸쓸해진다.
이제 금년도 찾아온 겨울과 함께 12월이란 달력 한장 달랑 남겨놓고 저물어간다. 저무는 것이 어디 계절뿐이겠는가 마는, 추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자꾸 시려오는 허전한 마음이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처럼 슬퍼진다. 저렇게 떨어진 낙엽속에 묻힌 슬픔과 허전함이 썪어서 새싹이 나려면 또다시 긴긴 날을 동면으로 보내야 할 것 같다. 나의 초등학교때 어린 시절 이맘때는, 십리길이 족히나 될 만큼 먼 거리를, 몽당연필 몇개와 지우개, 연필 깎는 칼, 등이 들어있는 필통을 딸그랑거리며 책보를 어깨에 질끈 동여매고, 찬바람 부는 이른 아침 길을 흰 입김과 무서리가 스프레이처럼 뿜어 나오는 이빨 시려운 추운 초겨울의 신작로길을 헉헉대며 뛰어서 학교로 달려가던 아련한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케케묵은 묵은 앨범을 펼쳐본다.
오랜 세월 숙성된 오크통의 포도향 같이 은은히 떠 오르는 오랫 옛날의 필림 속 장면이 하얀너울이 되고 구름속에 그림자 드리우듯이 빛바랜 사진속에 묵은 정을 우려내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면 이때는 한해의 끝자락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마감을 준비하는 때이다. 곧 있으면 추위속 한파와 폭설이 우리 모두를 움추러들게 만들 것이다. 지금 우리들 곁에 찾아온 계절은, 차곡차곡 쌓여있는 낙엽위에 하이얀 솜털 같은 흰눈으로 이불처럼 덮어줄 것이고, 우리는 눈 덮인 낙엽을 밟으면서 다가올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워보는 때이기도 하다. 하루 하루를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도 적어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는 빠른 시간속에 과거를 회상하고 돌아보는 시간은 어쩌면 시간적 낭비이고 비 건설적인 행동으로 치부한다.
내 앞에 장승처럼 우뚝 서있는 저 나무는 자신의 분신인 나뭇잎을 낙엽으로 보내고 나면 나이테가 하나 더 늘어난다. 즉 나이를 한살 더 먹는 것이다. 그렇게 나이테가 하나둘 더해 가면서 고목으로 성장하고, 고목은 다시 노목이 된다. 인고의 역사를 간직한 노목은 지나온 세월을 얘기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시간만을 기다린다. 늦가을과 초겨울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모든 계절은 변화하지만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한조각의 추억은 영원하다. 겨울의 문턱에서 문득 슈베르트의 음악을 한곡 듣고 싶다. 어려움속에서도 늘 밝음을 추구했던 그의 음악이 어쩌면 인생의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우리 모두의 바램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제법 차고 싸늘하다. 지나간 가을, 출렁이는 벼 이삭의 낟알만큼이나 수없이 많이 몰려왔던 상념들도 이제는 계절 탓인지 찬바람 속에 묻혀버렸다. 우리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족을 구성하고, 열심히 일하고, 집을 사고, 친구를 사귀고, 취미생활을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일까. 같은 값이면 더많이 소유하려 하고, 높은 위치에 오르려 하고, 그렇게 아웅다웅 티격태격 본연의 모습 한번 돌아보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것이 우리네 삶일까. 그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고, 상처내고, 자기편 만들려 하고, 내편 아니면 적으로 간주해서 죽이고, 하는 이런 모습이 진정한 삶의 의미일까? 사람답게 사는 일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살다 간 선현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인류를 위하여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밤을 지새우게 하는 문학작품들, 음악, 회화, 문화유산들 그분들은 그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뇌의 밤과 치열한 삶을 살았을 것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일에 또한 얼마나 행복해 했을 것인가. 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만의 논리를 만들어 대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는 것일까. 나무 한그루도 봄이면 꽃피고, 여름이면 찬란한 신록으로 덮여, 설렘으로 저리는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흰눈이 내리면 그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진실앞에 어떤 초인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세상일이, 자기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곰곰히 묵상해보면 태어남도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남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죽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인간이 가진 숙명적 한계이기도 하다. 겨울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그 숙명적인 유한성을 깨닫고 초연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더 따듯해지고 아름답고 행복해 질것이다.
생각과 인생의 고뇌가 함께 하는 계절, 커다란 우주의 진리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진실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일까. 많이 소유하는 것일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일까. 남을 호령하고 부리는 것일까……….카알 부쎄는 이렇게 노래했다. “산너머 언덕너머 아주 먼 곳에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기에, 아~ 나도야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이말의 뜻은 행복의 실체가 보라 빛 무지개가 아님을 역설하는 말이다. 진정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 정하는 잣대’ 일 것이다. 천하를 가져도 더 가지지 못해서 발버둥 칠 수도 있을 것이요, 바람 한점 가리는 움막집에서 사는 삶이 전부라 해도 안분지족 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함께 살고 있다. 황제의 지위를 얻고도 마음은 더 공허할수도 있을것이며, 한갓 길거리의 청소부도 희망을 꿈꾸는 이도 많을 것이다. 이미 이것은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철학자, 성현들이 지적한 진리들이다. 지난 가을의 외형은 풍요와 결실, 국화꽃 향기 그윽한 서정성이라지만, 인간의 내면은 지극히 우울하고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 그럴까. 현실에 대한 만족감이 없고 끝없이 남과 비교해가며 남에게지지 않으려는 이기심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가을 어느날 떨어진 낙엽처럼 그렇게 살다가 져갈 것이다. 삶의 허무가 온몸을 휘감는 계절이 이맘때이기도 하다. 세월의 무상함과 삶의 본질속에서 고뇌하는 인간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은 고달픈 삶의 울타리를 낭만적인 문학소년 소녀가 되어보자. 철학자, 성직자, 성현들이 남긴 말씀을 잠시라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사회가 더 밝고 겸허해져서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리라 믿는다. 너를 생각하고, 너를 배려하며, 너를 사랑하는, 또한 내가 가진 작은것에 만족하는,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행복은 결국 욕망을 비워내고 가난한 마음의 잣대로 그 범위를 정하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의 길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간다. 그래 ! 이제는 추운겨울이 바싹 우리의 곁에 와 있다.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마음의 고향, 나의 집으로 돌아가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