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긴긴 겨울밤의 추억
나는 중학교까지 시골의 고향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와서 다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나의 부모님은 형과 나를 위해서 서울에다 자취방을 얻어주고 그곳에서 나와 위의 형님은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때 형님은 대학을 다니고 나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주로 취사는 형님이 도맡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년에 서너번씩 서울에 상경하시면서 추수한 곡식과 밑반찬류(된장,고추장,마늘,고추,깨,콩)등을 힘겹게 갖고 오셔서 자취방의 윗목이나 부엌에 잔뜩 쌓아놓고 가셨다.
넉넉지 못한 두 형제의 자취생활 속에 호기롭게 주전부리 간식을 사먹는다는 것은 큰일을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 돈을 쓰면, 빠듯이 꾸려가고 있는 생활비에 비상등이 켜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전부리의 간식으로는 연탄불위에 양은냄비를 올려놓고 콩을 볶아먹든지 고구마를 구워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마음대로 양껏 먹고 나면 반찬으로 먹을 콩자반이 줄어들고, 이따금씩 끼니로 때우는 고구마도 거덜이 난다. 해가 일찍 저무는 길고 긴 겨울밤이 되면 저녁 먹고 숙제를 마치고 시계를 보면 이제 겨우 밤10시경이 되었다. 어둠이 깔릴때 먹었던 저녁식사가 아득한 옛날에 먹은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며 뱃속은 텅텅 비어있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허기를 느낄때(그때 그 나이때는 밥을 먹고 돌아서면 곧바로 배가 고팠다) 멀리 저쪽 골목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반갑고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있다. 메밀묵, 찹쌀떡장수의 외치는 소리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그 사람이 나의 자취방 창문곁을 지나갈 때면 정말로 참기가 힘들게 된다. 한창 젊고 무엇이던지 많이 먹고 싶은 그 나이 시절에, 먹고 싶은 것을 못먹고 참는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고문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속된말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먹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다” 어쩌다 참고 참다가 못 견디어서 찹쌀떡과 메밀묵을 사서 먹는날은 생일날 이상으로 먹는 즐거움이 극에 달한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땡땡땡 하며 종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차를 타고 집앞도로에서 내려, 손을 호호불고 시려운 발을 동동 구르며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연탄불로 따듯하게 덥혀진 아랫목의 요대기를 깔아놓은 속으로 얼은 손과 발을 디려 밀면 세상천지가 내 세상처럼 따듯한 기분이 든다.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저녁식사로 채우고 나면 곧바로 대입준비와 밀린 숙제를 하려고 책상위로 이동한다. 정신없이 읽고 쓰고 외우고를 반복하며 시간이 지나다보면 어느듯 시계의 바늘은 10시를 가르킨다.
이때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저쪽 골목 어귀로부터 들려오는 반가운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찹싸~~알 떠억. 메밀 무~~욱 사려.
언제 어디서든 배달음식이 가능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찹쌀떡과 메밀묵은 잊혀진지 오래된 간식이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코끝과 볼따귀가 시려오는 추운 겨울철에는 그때 그 메밀묵 찹쌀떡 장수의 구성진 소리가 그리워진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이나 대도시의 골목길에서는 이런 외침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먹을 것도 귀한 시절에 삼시세끼 밥 외에는 먹을만한 간식거리가 별로 많지 않았다. 풀빵,뻥튀기,꽈배기,호떡,군고구마,군밤,엿,번데기,군 땅콩,칡 뿌리 등등이 어린이들을 유혹하는 길거리 간식이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에 호떡이나 풀빵봉지가 들려있었다면 그날 밤은 별미를 포식하는 날이었다.
길거리 음식이라고 해도 밤이면 모두 퇴장한다. 대신에 먹음직스런 참새구이와 알싸한 소주를 갖춘 포장마차가 직장인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가정배달 시스템’을 꿈꿀 수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포장마차의 안줏거리 또한 그저 상상하면서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의 대목은 밤이 긴 겨울철이다. 기나긴 밤, 이른 저녁을 먹은 날이면 잠자리에 들기 몇시간 전에 배는 여지없이 “꼬르륵”소리를 낸다. 이때 들리는 “찹쌀 떠~억, 메밀묵” 소리는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다. 대문을 열고 나갈 필요도 없다.
창문을 열면 찹쌀떡장수는 건넨 돈만큼 찹쌀떡을 방안으로 넣어주니 사실 배달보다 더 편리하다. 찹쌀떡과 메밀묵을 외치는 행상의 음조는 누구나 다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굵직한 바리톤 음색을 쉴새 없이 일정한 성조로 내려고 연습을 꽤나 했을 것이다.
골목에서 아련히 들려왔다 사라지는 목소리를 듣노라면 악착스러움과 인생의 쓸쓸함 마저 느껴진다. 찹쌀에 단팥을 넣은 찹쌀떡은 값싼 간식은 아니다. 영양가가 높으면서도 소화가 잘돼 늦은 밤에도 먹기에 좋다. 찹쌀떡은 대학입시 등의 합격을 기원할 때도 먹는, 복을 부르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메밀묵도 열량이 낮은 건강음식이다. 찹쌀떡은 한때 결혼 답례용품으로 널리 쓰이기도 했다. 찹쌀떡에 메밀묵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왜 찹쌀떡과 메밀묵을 함께 팔았을까?. 찹쌀의 더운 성질과 메밀묵의 찬 성질이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연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찹쌀떡은 급히 먹다 사례가 들릴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부드럽고 물기 많은 메밀묵이 같이 먹기가 좋았을 것이다. 복어알을 먹고 죽는 사건처럼 찹쌀떡을 먹다 질식사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있었다.
묵은 계절에 따라 재료가 다르다. 녹두로 만드는 청포묵은 주로 봄이나 초여름에, 7.8월에는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을 먹었다. 가을이 되면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들었다. 메밀묵도 겨울음식이다. 청포묵이 양반 음식이라면 그보다 재료값이 싼 메밀묵과 도토리묵은 서민 음식이다.
찹쌀떡과 메밀묵 장수는 더러 어른들도 있었지만, 신문배달과 함께 가난한 고학생들의 돈벌이 수단, 요즘말로 하면 아르바이트였다.
통행금지가 있을때, 하나라도 더 팔려고 밤늦도록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야경꾼들은 통금을 넘긴 어린행상을 발견하더라도 못 본척 눈감아 주기도 했고 더러는 팔다가 남은 찹쌀떡을 야경꾼의 입에 넣어주며 단속을 모면하기도 했다.
찹쌀떡 장수들이 통금을 무시하고 쏘다니자 부정식품이라고 단속을 하기도 하였다. 찹싸~`알 떠~억, 메밀 무~~욱 사려. 찬바람이 쌩쌩 불고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기나긴 겨울밤, 인적이 끊긴 골목을 돌아 정겨웁게 들려오던 구성진 소리, 그 세월의 소리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건만, 길들여진 입맛이란 것이 이런 것인지, 요즘같이 춥고 긴 겨울밤이면 따끈한 아랫목에 이불 쓰고 둘러앉아 먹던 그 맛이 그립다. 각종 맛있고 영양가 많은 음식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시절이지만, 메밀묵 장사에게 받아든 메밀묵에 묵은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뚝~딱 입속으로 넘긴 메밀묵 한 사발이 아련히 생각나는 겨울밤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