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숲의 혜택

<김명열칼럼>  숲의 혜택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마치 열대의 정글림 숲을 연상하리만치 짙푸르고 우거진 광대한 숲으로 이루어진 자연 녹지림이 있다.

가끔씩 그 곁을 지나면서 언제나 싱싱한 푸르름과 우리 인체에 도움을 주는 산소를 풍부하게 공급해주고 있는 그 숲의 아름다운자연림을 감상하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수천 에이커가 넘는 그 자연의 숲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주택업자들이 그 땅을 사서 그곳에 수천호가 넘는 주택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식물의 나뭇잎 뒷면 혹은 어린 줄기위에 존재하며,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들을 기공(氣孔)이라 부른다. 식물은 기공을 통하여 광합성에 필요한 탄산가스를 흡입하고 광합성의 결과 발생한 산소를 방출한다. 그뿐 아니라 식물은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을 기공을 통해 수증기상태로 배출하는데, 식물학자들은 이를 증산작용(Transpiration)이라고 부른다. 식물학계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성년이 된 보통 크기의 나무 한그루는 여름철 하루 동안에 수톤의 물을 배출한다. 나무가 아닌 해바라기 한그루도 여름철 하루동안 약 1Kg의 물을 수증기형태로 배출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양이다.

이처럼 식물은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 증산작용을 통해 공기 속으로 방출하는데. 땅속에 스며든 빗물을 순환시켜 그것이 다시 비가 되어 내리게 하는 것이다. 비가 많이 와서 땅속에 물이 많으면 식물은 기공을 크게 열어 더 많이 수분을 증산하고 땅이 건조하면 기공을 작게하여 증산하는 물의 양을 줄인다. 식물이 물을 증산하는 과정에는 물의 기화열(氣化熱)이 필요하고 이 열을 주위에서 흡수해야한다. 숲이 있는 곳이 여름철에 시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숲은 이렇게 기후의 순화작용에도 큰 몫을 한다. 그러나 근시적 안목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숲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농지나 주택 및 산업용지로 만드는 단기 최적 의사결정을 즐겨한다. 이는 내일, 즉 장기적 차원에서 본 숲의 혜택보다 단기적으로 거둘 수 있는 소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패러다임 때문이다. 그러나 숲의 소멸로 증산작용이 사라지면 그 일대는 사막화되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인간들에게 막대한 폐해를 초래하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울창한 숲의 1헥타르는 연간 평균 이산화탄소 16톤을 흡수하고 산소 12톤을 내놓는다고 한다. 이 산소량은 45명이 1년간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에서 매년 730만 헥타르의 숲이 사라지고 있다. 이는 약 1억2천만톤의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과 8천7백만톤의 산소 생산능력을 줄이는 것이다. 이는 약 3억2천6백만명이 숨을 쉴 산소를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종이생산을 위하여 1년에 56억1천만그루의 나무가 사라지고 있다. 한장의 종이속에도 사람의 숨을 끊을 무서운 파괴가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숲을 고마워하고 잘 지키고 잘 길러야한다.

숲이 주는 가치는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숲은 목재를 생산하는 기능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해주는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력이 높아질수록 목재를 많이 사용한다. 자연소재인 목재가 건강과 분위기를 연출하고 가공이 편리하기 때문에 더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목재 아닌 비목재 생산물이 있는데 이에는 버섯이나 산나물 등으로 숲에서 나오는 임산물이다. 요즘은 이러한 비 목재의 경제적인 소득이 늘고 있는 추세다. 국민의 청정 먹을거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에 우리에게 숲은 더욱 고마운 존재다. 더위의 쉼터로서의 그늘을 만들고 시원함을 선사한다. 숲이 있으므로 인해서 온도를 조절해주는 역할은 이상 기온에서 점점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산소공급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먼지와 미세 먼지를 흡착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해주는데도 숲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 태풍과 장마에는 숲이 있으므로 인해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한다. 나무뿌리들이 서로 흙을 잡아주어 토사붕괴와 토사유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숲을 건강하게 가꾸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숲이 물을 충분히 저장하는 기능을 발휘하려면 숲의 바닥인 토양이 발달되어야하고 낙엽이 잘 부식되어서 토양으로 침투되는 것 등이 필요하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과 푸른 숲이 울창한 여름의 산을 참으로 좋아하고 사랑한다. 비록 고마운 이 땅에 나무 한그루 제대로 심지 못한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가슴에 애잔한 감수성이 파랗게 피어오를 때면 저 울창한 숲이 마치 내것인양 공짜로 삼키고 싶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숲은 아찔한 기암절벽도, 섬뜩한 천년바위도,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도, 돌 뿌리를 걷어차며 어디론가 서둘러 내려가는 계곡물도 없는 그저 평범한 지평선위에 질펀하게 펼쳐져있는 야생의 숲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의 손길과 무관하게 억지로 꾸미고 다듬지 아니한 천혜의 자연숲이기에 더욱더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이 푸른 숲에 집착하는 것도 허무한 짓은 아닐 것이다. 색에 반응하는 인간의 뇌는 우리가 냄새나 맛에 반응하는 것과 똑같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눈맛이란 것이다. 색은 문화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기만해도 몸에 힘이 솟구치는 푸른 숲은 건강관리가 절실한 병약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정제요 영혼의 활력소이며 정신적인 에너지가 아니겠는가…………….

서재에서 글을 쓰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고개를 창문쪽으로 돌리니 파아란 바닷물이 시야 가득히 쌓여온다. 바다건너 저편에는 상록수가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다. 태양빛을 받아 녹색으로 점철돼 넘실대는 신록의 파도는 너무나 싱그럽기만 하다. 계절을 실감한다. 자연은 계절로, 인생은 마음으로 오간다. 바라볼 때마다 다르다.

눈의 숲과 마음의 숲, 세월의 숲과 계절의 숲…….. 계절을 바라보며 옛 일을 생각한다. 나이에 비례하는 계절의 흐름은 찰나다. 그 찰나의 계절이 아직도 남의 일이다. 인생의 석양에 삶의 지혜를 한아름 쌓는다고 하는데 , 나는 예외다. 세월과 함께 예외는 늘어만 간다. 계절이 바뀌면 바뀔수록 나의 입지는 좁아지고 결정 또한 줄어든다.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기 전에 몸을 도사리고 걱정부터 머리와 가슴속에 쌓여난다. 가벼워야할 마음은 비워지지 않고 오히려 무겁고 버거워진다. 빈손으로 갈텐데 왜 이리 애착이생기고 미련이 남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인데, 시간과 세월이 지날수록 후회는 그림자처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저쪽너머 보이는 푸른숲이 세월이다. 인생이다. 나이는 먹을수록 그 길이는 짧아진다. 남은 세월은 계속 줄어들고 미루어진 일들은 후회와 회한이 되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미루기에 익숙해진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숲을 보면서 보고 배우며 느끼는바가 많다. (숲은 보되 나무는 못보고, 나무는 보되 숲은 못본다)는 말이 있다. 숲속에 있는 사람은 나무는 보아도 숲은 보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일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면 국한된 범위내의 일은 잘 파악하고 있지만 그일 전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 일을 벌이면 벌인 만큼 심신의 에너지소모도 그만큼 많아진다. 장자(莊子)가 중국의 고전에서도 말했듯이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만든다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일을 아무리 많이 벌여놓는다 해도 그가 하루에 먹는 것은 세끼식사요, 그가 어마어마한 재물을 모으고 높디높은 명예를 얻는다 해도 저세상까지는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꽃도 만발하면 시들어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우주 자연의 순리이다. 노자(老子)에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자기 영역 안에 머물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며, 이로써 오래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반쯤 차야 바로 서있고, 가득 차면 쓰러지는 그릇이나, 비어있어야 완전한 형태인 벙어리저금통처럼 인생도 비어있는데서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불행은 만족할 줄 모르는데서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숲을 보고 배우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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