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따듯한 마음의 친절과 배려
친절이란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그리고 배려는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한국에서 이민와 캘리포니아주에 오랫동안 살다가 얼마 전에 이곳 내가 살고 있는 플로리다 탬파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 김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바로 나의 이웃으로 이사를 와서 부인과 함께 은퇴 후의 노후생활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계시는 분이다.
이웃에서 가깝게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 이제는 형제자매처럼, 매우 가까이 가족처럼, 흉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는 김선생님으로부터 그날, 토요일날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메일로 소식과 함께 재미난 이야기들을 보내주셨다. 보내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주 8월11일 토요일,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부인되시는 김 여사께서 우유가 없으니 마켓에 가서 우유 좀 사오라고 심부름 겸 부탁의 청을 해왔다. 평소 애처가로 소문이 난 김 선생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부인의 말씀대로 거행에 옮겼다. 그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요즘은 마누라님의 명령에, 논산훈련소의 훈병이 교관의 절대적인 명령에 따르듯이……” 0.5초도 안 돼 눈썹을 휘날리며 급히 차를 몰고 근처의 마켓으로 향했다. 부인의 주문대로 우유 한통과 바나나 5개를 싸 들고 나와 계산대에 서서 계산을 하니 4달러59센트가 나왔다. 주머니 안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불하려고 손을 넣고 보니 지갑이 보이질 않는다. 이리저리 주머니마다 모두 뒤져봐도 지갑이나 동전 한잎 짚이지가 않는다.
아~뿔샤~~~ 급히 나오다보니 편한 옷차림으로 집안에 있다 와서 지갑이나 돈을 갖고 나오지를 않았다. 얼굴이 벌게져 쩔쩔매고 있는 그를 가엾이 보며 뒤에 서있던 어느 40대의 미국인 여인이 그를 대신하여 물건 값을 지불해 주었다. 너무나 감사하고 위기감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기에 땡큐를 연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크리스챤이십니까?” 그녀의 대답 “No”. 그리고 그녀의 이어지는 말 “제가 지불한 돈은 나중에 당신처럼 실수하는 사람에게 갚으시면 됩니다” 라며 유유히 마켓문 밖으로 사라졌다. 정신이 멍해져서 물건이 들어있는 샤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오니 밖에는 장대 같은 소낙비가 억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기 차까지의 거리는 꽤나 떨어져있었다. 그대로 간다면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때 곁을 지나가던 어느 외국의 중년부인이 다가와서 “차 까지 데려다 줄까요?” 하며 물어왔다. “Sorry, No Thank you”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조금이라도 소낙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7~8분을 기다려도 소낙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내렸다. 얼마 후 마켓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온 조금 전의 그 여인이 아직도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서있는 그에게 다가와서 우산을 받쳐주며 같이 갈 것을 눈짓으로 종용했다. 해맑은 그녀의 미소에 사의가 곁들여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기 차까지 바래다준, 선한 일을 한 그녀에게 물었다. ‘크리스챤이십니까?’ 그녀의 답변 “저는 교회에 안 다닙니다”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들려주면서 하는 말, “나는 친절한 사람은 모두가 교인일거라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친절과 배려는 종교하고는 또 다른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 친절이나 배려, 그리고 사랑이나 도움은 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바탕위에서 행해지는 선의적이고 당연한 인간의 도리인 것이다. 물론 종교를 가진 사람이 친절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금상첨화의 일이지만…………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불인지심(不忍之心)은 남의 불행을 마음 편하게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다. 동정심, 혹은 연민의 마음이다. 맹자는 불인지심을 언급하면서 이 마음을 통해 인의예지가 천성적인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맹자의 불인지심이 아니라 해도 ‘친절과 배려’는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덕목이자 사랑이다.
조그마한 성의와 마음과 사랑이 담긴 친절과 배려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하는 열쇠이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나 사랑 역시 사람이 갖춰야할 미덕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고, 양보하고, 돕고, 배려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과 배려야말로 각박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원만하고 매끄럽게 이끌어주는 윤활유라고 할 수 있다. 사려가 깊은 사람은 그만큼 매사에 신중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배려도 하나의 예의이다. 그리고 예의바른 태도는 그 사람이 지닌 능력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예의는 상대에 대한 정중함과 상냥함에서 시작된다. 공손한 말투나 행동은 타인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표현이다.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얼굴보다 낫고, 아름다운 행위는 멋진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
미국 네바다주의 뜨거운 사막 한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가던 멜빈 다마라는 한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타시지요”. “고맙소. 라스베가스까지 태워다줄 수 있겠소?”.
어느덧 노인의 목적지에 다다르자 부랑자, 홈리스 노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25센트를 노인에게 드리면서 “영감님 이것 얼마 안되지만 차비에 보태 쓰십시요”. “참 친절한 젊은이로구먼 명함 한 장주게나”. 젊은이는 무심코 명함을 한장 건네 드렸다. “멜빈 다마, 이 신세는 꼭 갚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고 하네”. 그후 세월은 꾸준히 흘러 이러한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무렵, 기상천외한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 이런 기사와 함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하워드 휴즈가 남긴 유산의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멜빈 다마?.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길래 이렇게 많은 유산을 주지?. 사람들의 궁금증 속에 멜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언장의 이면에는 “멜빈 다마는 하워드 휴즈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이다”로 기록되어 있었다. ‘친절한 사람’, 이것이 유산을 남겨주는 유일한 이유였다고 한다. 무심코 베푼 인정과 25센트가, 미화 1억5천만달러(그 당시 한국돈으로 약 2천억원)가 친절과 도움의 답례 선물로 자기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사소한 친절과 배려가 인생을 바꾼다. 우리는 손길, 미소, 따듯한 말 한마디, 경청하는 귀, 진솔한 칭찬, 사소한 애정 표현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기 일쑤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을 잠재력이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