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한(恨)을 품고 사는 사람들
우리민족의 한이 무엇인가?. 가슴의 명치위에 기가 막혀있는 화기(禍氣)덩어리가 바로 우리의 한이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스트레스라고 표현하지만 한(恨)이란 뜻은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그것이 쌓이고 쌓여 덩어리로 뭉쳐진 “어떤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덩어리는 만져지기는 하지만 죽은 세포의 암 덩어리는 아니다. 그저 명치끝 위쪽에 온 몸의 신경줄이 한곳으로 서려있어, 심하면 사지를 뻗고 부들부들 떨다가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하는 홧병이다.
옛날 시골에서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마당에서 깡깽이를 켜고 발장구 북을 치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떠들어대던 약장사들의 달변이 생각난다. “요통 치통 두통에 좋고, 엠병 땜병 가다머리 속병의 만병통치약, 강원도 태백산 깊은 산속에서 자라난 흑곰의 간에다가 살모사 쓸개를 갈아 넣어 번갯불에 살짝 구워 만든 이 포룡환….. 날이면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먹고 싶다고 그 자리에서 당장 먹을 수도 없는 이 약으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이 약은 가다머리 속병에 최고의 명약인 것입니다” 약장사가 침을 튀기며 강조하는 이 가다머리 속병, 그 속병이란 것, 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의 가슴속에 뭉쳐있던 속병이 바로 한(恨)이었다. 진짜가 얼마나 들어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반닥종이에 동그랗게 싸여있는 약장사들의 포룡환, 그때 그 시절에는 별다른 약이 없었던 시대였으니, 그래도 그 포룡환이 가슴앓이 속병을 치료해주는 유일한 약이었던 것이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여인네의 한, 외아들이 군대에 가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받은 어머니의 한, 먹을 것이 없어서 부황이 누렇게 떠있는 자식들을 어쩔 수 없어서 측은하게 쳐다보아야만 하는 부모들의 한, 빚에 쪼들려 어디로든 도망을 쳐야하는 빚쟁이들의 한,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같이 쓰러져 한풀이도 못하는 우정의 한, 놀음판에 미친 남편을 둔 여인의 한, 첩질에 미쳐서 집안을 거덜내는 서방을 가진 아낙네의 한, 술만 먹으면 개망나니가 돼서 실성한 듯 마누라를 개패듯 때리고 처자식을 굶기는 술주정뱅이 아내의 속터지는 한, 시어머니와 시댁 시누이들의 며느리 쥐잡듯이 구박하고 행패를 부리는 핍박 속에 부뚜막에 앉아 한없이 눈물만 흘려야하는 갓 시집온 며느리의 한, 등등 이러한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피멍이 들어 모두다 가슴앓이 속병이 뭉쳐있었다. 가슴속에 한이 없이 평생을 평안한 생활 속에 생을 마치는 사람이 세상에는 몇이나 되랴?. 입으로 소리 내어 발산하지 않았다면 정신병자가 되고, 우울증에 걸리고, 몹시도 괴로운 한평생을 마쳐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 위로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의 탈출구 노래는‘한오백년’이었다. 지금도 한이 가슴속에 서려있는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불러보시기를 바란다. 많은 치료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요는 한을 풀어서 마음을 고치는 치료의 약이라고 했다.
여인의 한은 한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며 전형적인 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여자의 한이 얼마나 깊고 사무친 것인지 잘 말해준다. 왜 여자의 한이 이처럼 사무쳐있는가? 내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고 목격한 여자들의 한은 이렇다.
여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짓눌리고 짓밟히고 저주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한은 쌓이고 쌓였으며 설움속에 살다가 간 그녀들의 혼은 원혼(怨魂)이 되어 떠돌고 있다. 이들의 한은 어느 개개인의 한이 아니라 한국여자들의 집단적인 한이다. 여성은 삶의 밑바닥에서 가장 큰 아픔과 시련을 겪으면서 억세고 끈기 있게 살림을 일구어왔다. 여성은 가장 많은 억눌림과 소외를 당하면서도 가장 희생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여자는 남을 위한 희생적인 삶, 남을 살리고 구하기위해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 짓밟히고 짓눌리고 버림받았으면서도 삶의 밑바닥에서 살림을 맡았다.
웅녀(熊女+단군왕검 초기의 곰 여자 이야기 참조) 처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온갖 시련과 아픔을 참고 삭이며 이겨냈다. 여자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은 신앙적 영성의 풍성한 힘을 담고 있다. 여인의 희생적인 삶, 가문과 혈통과 민족을 구원하는 희생적인 삶이 한으로 응축되었다. 이렇게 버림받은 존재로서 남을 구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여자의 삶의 전형은 유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무속신앙을 통해 확립되었다.
‘바리공주 무가’에서 바리공주는 버림받은 막내딸로, 강요당한 결혼에서 아들을 낳아주고 모든 고난을 다 겪고 아버지를 죽음에서 건져내며 가족을 살리는 소임을 담당한다. ‘담금 애기 무가’에서도 버림받은 여자가 가족을 구하며 수난 받는 이들을 구제하는 자로 등장한다. 심청전에서 심청이도 이런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자기희생을 통해 남을 살리는 여인들의 삶 자체가 한의 화신이다. 버림받은 존재인 여성은 그들을 억압하고 짓밟는 남성의 혈통 계승과 가계의 존속을 위해 죽음의 피안을 넘나들면서 천신만고의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삶의 굴레가 곧 한이며 여자들이 이 굴레를 기꺼이 감수하는데 한의 아이러니가 있다. 여성은 수만년동안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통해 몸으로 남을 살리는 상생과 공생의 삶을 살아왔다. 살과 피와 뼈를 나누는 임신의 체험, 자기의 몸을 열어 생명을 낳는 출산의 체험, 몸의 진액인 젖으로 생명을 살리는 육아의 체험, 밥을 짓고 옷을 지어 남을 살리는 일을 통해 여자는 생명 나눔과 살림의 지혜와 힘을 익혔다. 여성은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삶을 살도록 신체적으로 운명 지어지고 사회적으로 강요되었다. 남을 위해 살도록 강요된 여성의 희생적인 삶은 한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살림의 지혜와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난과 희생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여성의 삶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고 죽음을 써 인류를 구원으로 이끈 예수님의 삶과 통한다. 예수님은 성 만찬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인류구원을 이끌었다. 십자가의 고난과 여인의 한은 통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자의 부당한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여자의 자기실현과 주체적, 자주적 삶이 추구되어야 한다. 여자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생명 의지와 갈망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남을 살림으로써 나도 사는 새로운 철학과 원리가 여자의 한스런 삶, 자기 희생적, 메시아적 삶에서 나와야한다. 여자의 한에서 여자의 풍성한 영성과 새로운 삶의 원리를 닦아내야 한다.
과거 한국인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한이었다. 그래서 한맺힌 민족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힌다고 했다.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은 마치 칼을 품고 사는 사람과 같다. 칼을 품는 마음은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한에 맺힌 마음이다. 분노로 얼룩진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을 품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칼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을 풀어야한다. 칼을 휘둘러 한을 풀려고 하는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은 칼을 품은 마음이어서 축복의 그릇을 엎어놓은 사람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칼을 내려놓는 사람이어서 축복의 그릇을 바로 놓는 사람이다. 큰 원수를 크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큰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제 끝으로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싶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칼을 품지 마십시요. 분노를 품지 마십시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요. 칼을 품는 사람, 한을 품는 사람, 분노와 미움을 품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은 천국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기업으로 선물 받습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