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아카시아 꽃이 필때…………….
1970년대 초, 산과 들에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5월 중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어느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먹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버렸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계시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편지였다.
그때만 해도 청와대의 육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통씩 받았었고, 이미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주었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육여사는 김두영 청와대 비서를 시켜서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봉투에 넣어 그 집으로 보냈다. 그 비서는 성남시에서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등성이의 빈민촌 낡은 판자 집을 몇시간 동안 헤매며 찾아서 겨우겨우 그녀의 집을 찾아들어갔다. “나는 청와대에서 육여사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거의 다 쓰러져가는 초막 같은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켜져 있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 비서관은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서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서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씩 그 비서관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그가 받았던 충격과 가슴 아팠던 마음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근교 산자락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며칠 후 그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는 쌀은 얼마 보이지않고 보리쌀이 거의 다 덮여있는 혼식 잡곡밥이었으며, 반찬은 콩나물과 국, 멸치볶음, 김치, 된장찌개, 두부무침, 등으로 차려진 평범한 밥상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고 군주격인 대통령(통치자)의 수라상이 웬만한 부자집 상 차림만도 못한 단촐한 밥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 비서관은 며칠 전 성남시 어느 가정주부의 집을 방문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영부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보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영부인은 앞에 놓인 냅킨을 집어서 눈물을 닦았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이 되어 아무런 말씀도 없이 천정만 쳐다보며 애꿎은 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그러고서는 지나치는 말로 “그나마 아카시아 꽃이라도 있으니 노모께서 굶어 돌아가시는 일은 면했구먼……..”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허기진 사람들에게 아카시아 꽃이 구호민(求護民)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아카시아 꽃은 굶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고마운 나무이자 꽃이었다. 옛날 보릿고개 시절, 시골의 농촌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추억과 기억들이 머리속에 남아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면서 산골길을 걸었던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 아카시아 꽃을 한웅큼 따 우물우물 먹으면서 주린 배를 채웠던 기억, 아카시아 꽃을 따서 밀가루에 버무려 쪄서 떡처럼 만들어 먹었던 기억, 이러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아카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자격이 없다. 아카시아는 춘궁기에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곧 구황식물이었던 것이다. 아카시아의 소중함을 모르고 이 시대의 민중들이 그 아픔을 알리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고 유익한 아카시아를 두고 어느 사람은 쓸데없는 잡목이라고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잘못된 상식의 이야기이다. 아카시아는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나무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한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아카시아나무는 ‘아카시아’가 아니고 ‘아까시’이다. 아까시 나무는 뿌리혹 박테리아가 있어 질소를 고정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척박한 토양에 아까시를 많이 심는다. 아까시는 생명력이 좋아 사방(砂防) 사업용으로 많이 쓰인다. 아까시 나무는 나무가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철도 침목, 수레바퀴, 선박 선단 부분에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까시를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아카시아나무의 학명은 Robinia pseudo-acasia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짜 아카시아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학명을 그대로 발음하면서 이러한 착오가 생기게 되었는데, 나는 오늘 편의상 우리나라 사람들이 널리 이름 지어 불리워지고 있는 현실 그대로 아카시아라고 쓰고 있음을 독자들께서는 양해하여주시기 바라겠다.
어렸을때 국민학교를 오가면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았던 기억 가운데는 아카시아 잎 따기 놀이가 있었는데, 아카시아 꽃은 대개 13개정도가 붙어있으며,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에게 이마빡을 손가락으로 쎄게 튕겨서 꿀밤을 때린다거나 책 보따리, 책가방을 대신 짊어지게 하는 등의 재미있는 놀이가 있었다. 꿀밤을 맞을라치면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아프지만 웃을 수 있었던 그 즐거웠던 시절의 날들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유년시절 아카시아 나무에 얽힌 추억과 기억들이 새삼스레 아련하게 떠오른다.
내가 살던 시골의 산천에는 5월 중순이 되면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나서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어렸을때는 나무에 올라가서 그 꽃을 따서 먹곤 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지금처럼 군것질거리가 없어서 동네친구들과 함께 따먹곤 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어머니는 그 아카시아 꽃을 따서 깨끗이 씻어 떡을 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어느 먹을거리보다 맛있었다. 또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진짜 진해 참으로 좋았다. 꽃중에 향기가 진한 꽃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생각 같아선 아카시아 꽃인 것 같다. 창문을 닫아놓은 방안까지 산자락에 피어난 아카시아 꽃 향기가 가득하니까…….은은한 그 향기를 맡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벚꽃이 피었을때 벚나무 꽃길을 걸으면 환상 그 자체인데, 아카시아 꽃은 별로 표가 안난다. 그러고 보니 벚꽃은 향기가 약하고, 아카시아 꽃은 예쁘진 않지만 향기가 진하다. 어쩜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듯 싶다. 벚꽃처럼 화려한 외모가 있으면 내면의 향기가 별로이고, 아카시아 꽃 처럼 외모는 화려하지 않지만 내면은 하얀 꽃 색깔처럼 해맑고 진하며 세상을 주목시키는 내면의 아름다운향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듯이……..
한 국가를 보려면 그 나라 어린이의 눈동자와 산을 보라고 했다. 어린이를 보라고한 것은 그 나라 교육을 보라는 것이고, 산을 보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1997년 여름, 미국의 한 상원의원이 특별항공기편으로 북한과 남한 상공을 거쳐 오면서 느낀 소감을 “녹색
으로 뒤덮인 널푸른 산야의 남한을 보고 지옥(북한)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이라고 되 뇌였다고 한다. 황장엽씨가 남한에 와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산림녹화가 잘되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1950년대 말 한국의 산림은 최악의 상태였다. 일제의 산림수탈과 광복이후 6.25전쟁 등의 혼란기를 맞았고 이후 무차별한 산림의 남벌이 횡행하면서 남한의 모든 산림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이러한 때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세우며 산림법을 제정하고 산림청을 발족(1967년)시켜 산림녹화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헐벗은 민둥산에 산림녹화의 기반을 세우고 다져준 1등공신의 나무가 바로 아카시아 나무였다고 한다. 지금 한국은 전국토의 산림녹화에 완전 성공하였고 한국을 세계적인 4대 조림국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환경분야의 세계적 저술가인 미국의 레스터 브라운 지구정책연구소장이 저술한 플랜 B2.0이라는 책에서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 성공작이며, 한국이 성공한 것처럼 우리도 지구를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브라운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치하했다.
구한말부터 50여년간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산림녹화를 박정희 대통령이 불굴의 의지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박정희가 아니어도 산림녹화가 가능했다고 반박을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경제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조차 기를 쓰고 반대를 하며 심지어는 공사현장에 찾아와서 드러눕고 죽기 살기로 투쟁을 벌리던 야당 지도자들이 이러한 산림녹화의 선견지명에 동참할리는 만무였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기를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며 메꾸었던, x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그 시절, 결코 돈이 되지 않는 산림녹화에 그토록 열정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아카시아 꽃과 나무도 과거의 우리들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우며 유익한 식량 나무였다.
아마 지금쯤에는 나의고향 산야에는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 싱그러운 5월의 미풍속에 휘날리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바람에 휘날리며 져가는 꽃잎 속에 옛날의 친구들이 아카시아 꽃을 한웅큼 입에 물고 미소진 얼굴로 떠올랐다 바람 속으로 사라져간다. 아~ 그리운 아카시아 꽃 속의 즐거웠던 추억들이여……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