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행복이란?…………
나의 대학동창중에 쓸쓸하고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가 있다.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삼촌 집에서 자랐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국민학교만 간신히 힘들게 졸업하고 이내 삼촌의 농사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2~3년 삼촌(작은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향학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삼촌 집에서 기르는 닭 4마리를 밤중에 몰래 닭장에서 끄집어내 자루에 넣고 무작정 읍내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읍내에 와서 닭을 팔아서 그 돈을 비상금삼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올 때도 돈을 아끼려고 기차 역사에 몰래 숨어들어 무조건 북쪽으로 향하는 여객열차에 올라탔다. 기차표검사를 하는 차장이 저만치서 오면 잽싸게 다른 칸으로 몸을 숨기고, 이렇게 숨바꼭질을 하면서 서울에 상경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아는 이도 없는 그 친구는 서울역에 내려 갈 곳 없이 역사에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어린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꼬박 이틀을 굶고 나니 허기가 져서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게 되었다.
하릴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염천교 시장까지 왔다. 시장입구에 다다르니 웬 손구루마(손수레)를 끄는 아저씨가 채소를 가득 싣고 낑낑대며 나오고 있었다. 채소를 너무 많이 실어서 혼자서 끌고 가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는 그 아저씨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손수레를 밀어주었다. 어린 소년의 힘이 보태지자 손수레는 한결 수월하게 서소문 비탈길을 올라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목적지인 낙원시장까지 왔다. 손수레 아저씨는 고맙다며 어린소년의 손에 20원을 쥐어주었다. 시장 골목에서 5원을 주고 수제비 한 그릇을 사서 먹고 나니 기운이 생겨났다. 그것을 계기로 시장에서 무거운 수레를 끄는 상인들을 도와주며 한푼 두푼을 모으고, 그 돈을 밑천으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잠은 걸인(노숙자)들과 함께 다리 밑에서 잤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고, 우연히 알게 된 친구 집에 기거하며 야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이후 대학에 입학해서는 어느 부잣집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비도 벌고, 그 집 아동의 부모에게 잘 보여서 그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하며 공부도하고 애들도 가르치고,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그 아이들의 부모님 가게에 가서 잔심부름과 가게 일을 도왔다. 그 집 부부는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며 많은 돈을 모은 알부자 재산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 그 역시 어린학생 부모님의 도움으로 포목점을 열었다. 그리고 돈도 벌고 안정을 찾자 예쁜 여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 친구는 불행하게도 인생의 전반기에 두번 결혼하고 두번을 이혼했다. 그에게 금전의 운은 따랐으나 결혼의 운은 따르지 않았다. 결혼기간은 총 8년이었다.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애당초 그 친구는 사랑에 서툴거나 결혼이라는 제도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결국은 그렇게 살다 홀몸의 노인이 되어 불행하고 고독하게 생을 마쳤을까. 그러나 그러한 추상과는 달리 그렇지 않았다. 그는 39세때 세번째의 아내를 만나서 36년 동안 아주 행복한 부부로 잘살고 있다. 그 친구가 결혼에 두차례 실패한 것은 그가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데다 자신보다 더 불안정한 감정을 지닌 사람에게 끌렸기 때문이었다. 이를 깨달은 그는 자신을 편안하게 보살펴주는 여성을 세번째 부인으로 맞아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배웠다.
행복이란 참으로 알쏭달쏭 하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남몰래 우울증치료제를 복용하고, 동창회에 나가보면 꼭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이 잘되고 성공해서 표정이 가장 밝다. 행복은 재산순도, 성적순도 아니라는데,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 친구의 사례에서 보듯, 이혼을 했다고 해서 불행해지고, 향후 부부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최근 어느 미국 잡지의 설문조사에서 보니, 재혼자 280명 가운데 242명이 현재의 결혼생활에 행복을 느끼고 산다고 했으며 재혼기간은 평균 28년이었다고 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연구대상자들은‘부부끼리 서로 의지하며 참고 이해하며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양보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마다 저다운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본다. 그 안경의 빛깔이 검고 흐린 사람도 있고 맑고 깨끗한 사람도 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맑은 안경을 쓰고 통하여 인생을 바라보느냐, 그것은 자기의 마음에 달린 문제다. 불평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내다보면 듣고 경험하는 것이 모두 불평투성이요, 감사와 행복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에서 축복하고 싶은 것들이 한없이 많을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면서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슬프게 보이고, 혹은 정답게, 또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육체를 쓰고 사는 정신을 가진 사람인 이상, 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누구든지 먹고 살기위한 의식주와 처자와 친구와 명성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돈, 건강, 가정, 명예, 쾌락, 등등은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떠나서 우리들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행복의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과 행복의 조건들을 가진다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해야할 별개의 문제다.
가령 집을 지으려면 돈과 나무와 흙과 시멘트가 필요하지만 그런 것들을 갖추었다고 곧 집이 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 논리다.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감을 떠나서 행복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좋은 가정을 갖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한 사람, 또 그와는 반대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별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사실상 행복한사람을 우리는 세상에서 자주 본다. 전자의 불행은 어디서 유래하며 후자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맹자는 말했다. 그러나 맹자는 다시 말하기를 선비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맹자의 항산이란 말을 행복의 조건이란 말로 바꾸고 항심이란 말을 행복이란 말로 옮겨 생각해도 그 뜻과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선비는 행복의 조건을 못 갖추었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맹자의 행복의 논리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의 객관적 요소라고 한다면 행복감은 행복의 주관적 요소이다. 즉 행복은 이 두가지요소의 종합에 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면서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또 행복해질만한 조건은 별로 갖추지 못하면서도 행복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 맹자의 표현을 빌어서 말한다면 항산이 없더라도 항심이 있음은 어찌된 까닭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의 문제다.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링컨은 말했다.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마음의 어떠한 문제일까? 나의 분을 알고 나의 분을 지켜서 인생에 지나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슬기롭다. 지족(知足)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의 하나다. 자기의 분(分)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과 담을 쌓은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행복을 원하거든 감사를 할 줄 아는 마음을 기르고 배워야한다. 사랑과 노동과 신앙, 인생의 참된 행복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