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행문> 시카고에서………..


<김명열기행문> 시카고에서………..

(지난호에 이어서……….)

시카고에 최초로 발을 디딘 한국인은 유학생 서재필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에 이어 개화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한 서재필은 갑신정변 다음해인 1885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죠지 뷰케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하여 시카고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에 이어서 윤치호가 1893년에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던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차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방인구조사 보고서에는 1910년까지 시카고지역에는 한인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920년 인구조사에는 약 30명의 한인들이 시카고에 거주한 것으로 집계되어있다. 1930년에도 일리노이의 총 한인인구가 100명이 못되었던 것으로 인구조사국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방인구조사에 응하기에 떳떳한 법적 신분을 갖지 못해서 통계에서 누락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상되나, 당시의 이 지역 한인 실세가 상당히 약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1920년경에 시카고에 거류했던 한인들의 거주형태를 보면 하와이농장 이민을 거쳤거나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최초의 한인교회 역사와 설립과정을 보면, 1923년 9월 창립된 감리교회가 최초의 한인교회로 공식화 돼있다. 시카고에서 유학생과 거류민들을 포함하는 첫 공식모임의 시작인 감리교회의 태동은 1919년 조국의 3.1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용 저‘재미 한인 50년사’에 따르면 1924년 강영소와 김경, 박장순, 차의석, 김원용, 조희렴, 염광섭 등의 발기로 시카고에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했다고 쓰여 있다. 처음에는 미국인교회를 빌려 지하실에서 예배를 보았고 1927년 이 교회는 레익 팍 에비뉴로 정식 예배소를 옮겼으며 이것이 한인최초의 한인 사회봉사센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교회 안에 조직된 학생회는 훗날 시카고 한인사회의 한인회 탄생의 기초가 된다. 이상 열거한 모든 내용들은 내가 이민와 시카고에서 몇십년동안 오래 살면서 보고 느끼고 들은, 알고 있는 내용들을 사실적으로 적어보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여행을 마치고 시카고에 들러 볼일을 보고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면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지난 4월달에 나의 막내딸이 이번 12월 6일에 열리는 세계적인 테너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입장권 티켓을 미리 사서 엄마, 아빠에게 선물해서 그 공연을 보기위해서도 시카고에서 며칠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티켓은 발매 시작 후 단 몇시간만에 약 2만장의 공연티켓이 금새 다 팔려서 매진이 됐다고 한다. 그만큼 인기가 좋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계적인 가수의 공연을 보기위해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든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에 대하여 소개를 해 드리기로 하겠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흔히 말하기를 최고의 팝페라 가수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테너, 시각 장애인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으며 1994년 산 레모 음악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하였다. 그 이후 보첼리는 팝과 클래식, 8개의 오페라 음악을 포함한 13개의 솔로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하여 세계적으로 거의 8천만장 가깝게 이르는 음반을 팔았다. 1998년 잡지 ‘피플’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50명중의 한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1958년 9월22일 오전 5시10분, 한 아기가 세상 밖으로 태어났다. 새 생명이 엄마의 뱃속을 벗어나 밖으로 태어난 것이다. 몸무게 3.6Kg, 엄마와 아빠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생후 15일쯤 지나서 아이는 웃었고, 9개월만에 첫 걸음마를 떼었으며 6개월만에 입 안에 첫 이가 생겨났다. 아이의 부모는 아기의 육아수첩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이야기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갓난아기 시절의 육아일기이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이탈리아 토스칸의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 라자티코의 가정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이는 태어난지 몇달 안 되어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선천성 녹내장이었다. 이는 조만간 닥쳐올 충격적인 시각장애를 예견하고 있었다. 부모는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병원에 머문 몇 주 동안 안드레아의 시력을 얼마간이나마 회복시키려는 여러 가지 방법의 시도를 했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완전치는 않았지만 아직 한쪽의 눈은 시력의 근거를 남겨두고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은 안드레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기가 우렁차게 울어대다가도 음악을 들려주면 신기하게도 울음을 멈추고 조용해지곤 했다. 특히 보첼리와 노래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주위의 친척들은 그의 재능에 많은 관심을 갖게되었고 기대를 걸게 되었다.
특히 위대한 성악가 벤야미노 질리의 추종자였던 아저씨는 카루소를 비롯해 마리오 델 모나코, 쥬세페 디스 테파노등 전설적인 성악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드레아는 그들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특히 프랑코 코렐리는 보첼리가 본받고 싶은 영웅이었다. 1965년 3월 보첼리의 부모는 극장도시로 유명한 아름답고 작은 도시 레지오 에밀라의 우수한 시각장애 학교에 입학시켰다. 보첼리의 목소리는 학교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성가대에서 독창자가 되었다.
10세때는 선생님, 부모, 지방당국자들을 포함한 2백여명의 청중 앞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러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이후 가는 곳마다 노래 요청을 받아야했다. 그가 11세 되던 해 여름방학을 끝내고 안드레아는 학교에서 본격적인 음악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조합하는 방법을 배웠고 플륫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밤, 침대로 그것들을 가져와서 밤이 새도록 공부했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이미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보첼리아의 주 관심사는 음악이었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활력 있는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트랙터나 나무위에 올라가는 것을 즐겨 애를 먹이곤 했던 그는 지금도 말을 여러 필을 갖고 있고 이따금씩 말을 타고 해변을 달리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이런 기질이 불행을 불렀다. 12세가 되던 해, 보첼리는 여름방학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었음에도 시소, 링, 공중그네, 따위의 놀이기구를 즐겼고 수영을 배웠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아이들과 경쟁했고 지기라도 하면 굴욕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고도 그는 스포츠 따위의 신체활동에 열중했다. 그의 시력은 아직까지는 한쪽 눈만으로 아지랑이 같은 자욱함 속에 빛과 색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첼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면서 골키퍼를 맡고 있었는데, 골대로 날아온 공이 그만 눈을 세차게 때렸고 그로 인해 뇌에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 얼마후 출혈은 진정되었지만 가뜩이나 시야가 좁아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게 되었다. 어느 때인가 이제는 완전히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보첼리는 성악가의 꿈을 접어두고 현실적인 자립에 대비하기위해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피사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1986년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의 꿈을 거둘 수는 없었다. 그는 줄곧 피사의 피아노 바에서 연주를 즐겼다. 프랭크 시나트라, 아르나 부르, 세디뜨 피아프의 고전적인 명곡들이 주 스토리였다. 이따금 성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정을 좋아하는 아리아의 연주로 달랬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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