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행문 > 요세미티 국립공원(5)
(지난호에 이어서……)
승용차를 이용한 가족 투어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경우 계곡의 남쪽 산꼭대기에 있는 글래이셔 포인트를 꼭 둘러보길 권한다. 거기에서 보면 저편에 보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요세미티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계곡에서 보이지 않던 강의 상류에 있는 또 다른 폭포인 버날폭포와 네바다폭포도 볼 수 있다. 자기가 운전을 하지않고 요세미티 투어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면 좋은 방법이 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무료 셔틀버스에서 유료 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무료 셔틀버스는 매일 요세미티벨리 곳곳에서 운행되고있다.(여름철에는 밤10시까지 운행되지만 겨울철에는 단축 운행된다). 19개의 정류장이 있어 어느곳 에서나 그냥 올라타면 된다.
매10분에서 20분 사이에 운행되고 있다. 공원내 가장 인기 있는 유료투어는 연중내내 운영되는 벨리 플로어투어(Velley Floor Tour)이다. 요세미티벨리를 통하는 2시간 소요 26마일의 투어로, 요세미티폭포, 하프돔, 엘 캐피탄, 그리고 브라이드베일 폭포 등의 명소를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오픈 트램을 타고 투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방해받지 않고 주변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겨울에는 오픈 트램이 아닌 지붕이 있는 버스를 탄다.
글래이셔 포인트, 와우나, 마리포사 그로브, 투올러미 초원으로 가는 다른 루트 투어도 있다. 등반객들을 위한 한가지 팁으로 버스를 타고 글래이셔 포인트나 투올러미 초원까지 가서 그곳에서 벨리로 거슬러 산행하는 방법도 있다. 이상의 버스투어 안내는 방문객센터에서 안내인이 설명해 준 것을 인용해 설명을 드렸다. 우리 세가족은 며칠간 머물면서 새크라멘토에서 렌트해온 렌트카를 타고 요세미티 벨리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여유있게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참고로 요세미티 벨리 서쪽 남쪽 관문 옆에 위치한 파이오니어 요세미티 히스토릭 센터를 방문하여 옛날의 원주민들의 생활모습들을 둘러 보는것도 좋은 공부와 더불어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되리라 생각이 든다 이곳은 옛날의 요세미티 개척의 스토리가 온전히 담겨있는 모습 그대로를 당시 거주하던 사람들의 마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통나무로 지은 집들의 180년대초 그 옛날 모습들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관광을 마치고 만약에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콜럼비아 스테이트 골드러시 역사공원을 방문하여 서부개척시대의 금 채광과 그때의 모습들을 직접 견학해 보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 하이웨이 49번과 120번 Sonora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California Gold Rush시기인 1840~1855년은 당시 캘리포니아 준주 콜로마이 슈터밀에서 제임스 W. 마샬이 1848년 1월 24일 금을 발견
함으로 촉발된 사건이다. 황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한 약30만명의 인구가 캘리포니아로 몰려 들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북부의 샌프란시스코 주변의 산악지대는 금이 이곳저곳에서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로인해 이를 경쟁적으로 채굴하는 골드러시가 생겨났다. 골드러시의 영향은 상당한 결과를 낳았다. 작은 개척지였던 샌프란시스코는 금세 신흥도시로 성장하였고, 캘리포니아일대는 도로, 교통, 교회, 학교, 마을들이 건설되었다. 이에 대한 영향으로 법률체계와 정부가 창설되어 1850년 협정의 일부로서 이해에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31번째 주로 탄생되었다.
골드러시는 캘리포니아 콜로마에 가까운 서터스 밀에서 시작되었다. 1848년 1월24일 새크라멘토의 개척자 존.서터가 고용한 현장감독이었던 제임스 마샬은 아메리칸 강가에 건설하고 있었던 제재소의 방수로에서 빛나는 사금을 발견했다. 마셜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은밀히 셔터에게 가져갔고 두명은 비밀리에 조용히 발견물을 조사했다. 이 조사로 마샬이 가져온 조각이 금인 것을 알게 되었다. 셔터는 금의 대대적인 탐사가 시작되면 대규모 농경을 하려했던 자신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당황했고, 이러한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소문은 퍼지기 시작했고, 1848년 3월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 사주로 있던 상인 사무엘 브래넌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는 금광물자를 파는 상점을 서둘러 차린 이후에 금을 넣은 작은병을 들고서, 샌프란시스코일대를 활보하면서 “금이다. 금이다. 아메리칸 강에서 금이 발견 되었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것은 이후의 그의 가장 유명한 인용구가되었다. 금이 발견되던 당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영토인 알타 캘리포니아의 일부였고, 금 발견직후 1848년 2월2일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에 의해 이지역과 알타 캘리포니아의 나머지부분이 미합중국에 할양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작은 개척지였다. 주민들은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주나 사업가까지 골드러시에 가세해 당초는 고스트타운이 되어있던 이 마을이 그 후에 상인이나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급작스레 인구가 늘어났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1848년에 약 1천명 정도였는데 1850년에는 2만5천명까지 늘어났다. 많은 신흥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갑작스런 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나 금광이 가까운 마을의 기반시설이 체증(모자르고 부족하게)되었다. 사람들은 텐트, 목재의 가건물, 오두막집, 혹은 버려진 선박에서 뜯어낸 선실에서 살기도하였다. 금이 발견된 곳은 어느곳에라도 수백명의 광부가 공동으로 캠프를 만들고 그 권리를 주장했다. 각각의 캠프에는 Rough & Ready, Hang Town따위의 이름을 짓고, 캠프에는 술집이나 도박장이 생겨났다. 금을 캐기 위해, 일확천금을 벌기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선박이 전 세계로부터 상품들을 실어 날랐다.
중국에서도 도자기와 비단, 스코틀랜드의 물품 등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면 선장은 배의 승무원들이 탈출하여 금광으로 달려가는 일로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부두와 도크는 수백척의 배가 버려진 채로 남아, 마치 마스코트의 숲처럼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기업가는 버려진 선박을 창고, 술집, 호텔, 심지어는 감옥으로까지 사용하였다. 이러한 배들의 상당수는 일어나는 주거 수요에 따라 마을의 건축물을 짓기 위한 토지 매립재로 쓰이기 위해 파괴되었다. 캘리포니아 인구는 금 발견 이전의 1만5천명에서 금을 발견 3년후에는 25만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때 모여든 광부들을 포티나이너(49er)라고 부르며 그 흔적은 Gold Country의 중심, 캘리포니아 정치 1번지로 알려진 새크라멘토 도심 여러 곳에 남아있다.
미국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 캘리포니아주, 주자체만으로도 세계 7위의 경제력을 갖춘 캘리포니아주 살림을 운영하는 주 정부청사(State Capital 가 있는 곳은 새크라멘토 시이다. 이곳은 캘리포니아의 주도이다. 도심은 두개의 강(아메리카 강, 새크라멘토 강)이 만나는 평평한 분지위에 들어서 있으며 도심 동쪽 강변에는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이 쌓여있다. 도심지 도로는 바둑판 형식으로 구획되어있고 도로명은 숫자와 알파벳을 사용한다.
다음호에 이어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