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글을 쓰는 작업

<김명열칼럼> 글을 쓰는 작업

나는 매주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내며, 오늘 이 시간도 글을 쓰고 있다.
작자나 필자가 써놓은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는지 대충은 짐작을 하며 판단을 내리게 된다.
사랑을 고백하는 연서(戀書)의 글이나 안부편지를 비롯한 일반 내용의 정보의 글도, 짧게 표현한 문장의 글도, 자연을 노래한 예찬의 글월도 모두가 글을 쓴 작자의 내면과 그 속에 함축된 사상과 이상, 감정, 의미, 등의 조합과 문장의 억양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고 있다. 글의 내용을 최대한 절제를 하더라도 그 짧게 쓰여진 내용 속에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그 사람을 몽땅 내보여준다.
프랑스의 박물학자 뷔퐁은 이렇게 말했다.”글은 곧 사람이다” 말은 입에서 나오면 그 순간에 사라져버리지만 글은 그 자체로 필자의 책임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작가(글을 쓴 사람)가 쓴 글은 그 사람의 사상과 심경을 솔직히 지면위에 표현했고, 그로인해 매 글월의 문장마다 글을 쓴 이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다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잘 맛있게 만들려면 좋은 재료를 적당하게 잘 배합하고 조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을 쓰는 것 역시 음식을 만들 때처럼 무슨 재료를 얼마나 만큼 넣고 배합을 할 것인가가 문제다. 따라서 글을 쓰는데도 문장력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지적 자원, 정확하고 효율적인 표현능력과 문장의 구사능력이 있어야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프랑스의 박물학자 뷔퐁은 “문체(글)는 곧 사람이다” 라고 말했듯이, 글은 자신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고 개성이 있으며, 문장 속에는 표현하고 의도하는 모든 목표와 요점들이 정례하게 나열되어야한다. 아울러 글을 잘 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내면에 내재된 지식과 정보를 적절하게 끄집어내어서 잘 구사력을 갖추고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한다. 말보다는 언어적 표현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하기 때문에 많은 훈련을 통해서야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체계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좋은 글을 쓸 수가 있다.
글쓰기의 논리성과 일관성, 연결성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글을 쓰기위해서는 많은 지식정보를 가져야하지만, 나 자신은 늘 언제나 부족감과 아쉬움을 갖고 글을 쓰고 있다.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독자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다수가 글쓰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짓거나 특정할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 할 수도 없으므로 글쓰기는 매우 어렵고 때로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세상의 모든 필자(筆者)들은 자기의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정독(情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모든 글을 함부로 성의 없이 읽는 것이 으례 상례화 되어 있다. 독자가 글에 완전히 몰입하기를 원하는 필자의 기대는 대부분 착각이며 배신을 당하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들, 독자들은 글의 대강을 대충대충 읽으려한다. 글 쓴 작가에게는 그것은 큰 문제거리이고 부담을 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그러하니 어쩌지를 못하고 감수해야한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 글을 쓴다. 이렇게 써놓은 글 중에는 글재주를 부려 쓰는 글과 삶의 깊은 경험이 스며있는 글은 구분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좋은 글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글(美文)이 아니다. 정확한 글이다. 그런 글을 쓰려면 경험과 통찰과 지식은 물론 내공이 요구된다. 또한 거기에는 삶의 고통을 갈무리하는 인내와 단련이 필요하다. 글재주로 제작하여 쓴 글은 잠깐의 재미와 흥미는 주겠지만, 큰 감응을 주지는 못한다. 좋은 글은 글재주나 기발한 관념놀이에서가 아니라 그 글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에서 우러나온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글쓰기가 있어왔다. 철학에서건 문학에서건 종교에서건 간에 이 글을 쓰는 작가의 손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남에게 표현하고 전달해왔다. 글쓰기 없이는 아무리 궁극적인 의미가 있어도 그 의미를 고정화, 객관화, 보편화 하여 지속적으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각종교의 성전(聖典)들, 철학과 문학의 고전(古典)들도 글쓰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우리는 흔히 생긴 대로 논다. 꼴값 한다고들 말을 한다. 여기서 사람은 각자 생긴(꼴)을 지니고 있고 어느 꼴이든지 각자가 지닌 ‘꼴의 값’ 즉 값어치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꼴은 이미 주어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꼴’이 본래의 값어치를 발휘해야한다고 자각할 경우, 사명과 주어진 현실의 운명이 합쳐져서 하나의 꼴을 이루게 된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꼴값을 하는 일이라고 본다. 스스로의 ‘꼴’이 값(가치)을 하나하나 매겨가는 일, 그래서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써놓은 글을 읽기는 쉬워도 쓰기란 정말로 힘들고 어렵다.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닌 10여년(정확히 16년)을 계속 빠짐없이 매주, 매번 독자들을 위하여 신문사에 글을 써 올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글을 써 보낸 원고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좋고 신문사와 애독자들이 득이 되는 일이니 서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성심과 성의, 모든 열정을 다 기울여서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이 시간도 나의 감성, 지성, 양심, 교양, 철학, 종교, 문학, 경험 등등의 모든 영역을 총 망라하여 세계관과 사회관이 뒤섞여져서 하나의 글판이 만들어지고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인 것도 있고, 쓰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써야하니까 쓰기도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좋다. 어느 때는 글쓰기에 몰입하다보면 창밖에서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 벼락이 쳐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글 쓰는 데만 정신이 집중되어 모를 때가 많이 있다. 글을 쓰다보면 어느 새인가 그 글로 인하여 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음속과 머리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글을 써보시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면 가슴속에 맺힌 것이 다 풀리기도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글을 써 보라.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정체모를 두려움과 걱정이 수면위로 올라온다. 숨겨있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직시할 수 있게 되면 두려움이 힘을 잃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는 기회를 부여한다.
흔히들 글을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비유한다. 그 비유처럼 글을 쓸 때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 혹은 진짜의 생각을 담기위해 전념해야 한다. 진짜의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글은 존재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군가 시간을 내어 읽을 가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 않기 위해서 오늘 이시간도 부단히 노력하며 정성과 마음, 심혈을 기울여서 글을 쓰고 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숙면을 이루고 있는 이 밤에 나 홀로 호젓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깊은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있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25분이다. 1시간 30분정도가 지나면 몸을 씻고 준비하고 새벽예배 기도회에 나가야한다. 마음을 정화시키고 다듬으며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 들이쉬고 마지막의 문장을 마무리한다. 몸은 피곤하지만 하나의 글(문장체)이 완성됐다는 만족감에 보람을 느끼며 자긍심을 가슴속깊이 담아본다. 이것이 내가 글을 써 올리는 하나의 이유이고, 삶의 완성이다. 이렇게 힘들이고 심혈을 기울여 공들여 쓴 글을 독자들께서 귀하게 여기고 정독을 해주시는 독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항상 나의 글을 애독해주시는 인터넷 해외 여러 나라 애독자들께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그 분들을 위해서도 더 열심히 정성을 다해 글을 써야겠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낀다.
모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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