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노인의 훈장, 백발(白髮)

<김명열칼럼> 노인의 훈장, 백발(白髮)

가까이 지내고 있는 K씨의 머리가 어느 날 만나보니 갑자기 얼룩강아지가 되어있다. 사연을 알고 보니 이제껏 흰머리를 까맣게 염색을 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외손주 녀석이 와서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외손주 녀석은 외할아버지를 보자 이렇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머리가 까매? 우리 할아버지는 하얀데…..”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외손주는 한 달에 한,두번 정도 제 부모를 따라 외갓집을 방문하는데 몇 달 전에 와서 외할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그 손주녀석의 말을 듣고 K씨는 그 후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을 중단했고 그로부터 반년이 흐르고 난 뒤에는 원래 본연의 모습인 백발이 됐다. 그때 그 외손주, 꼬마의 물음에 그는 나름대로 깨달은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머리카락도 나이다워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얼굴은 늙어서 주름이 잔뜩 생겼는데 머리카락만 검게 염색했다고 건강하거나 젊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할머니는 할머니의 나이답게, 하늘과 신의 섭리가 정해준대로 나이가 들은 노인들의 머리는 백발이어야 노인답고 또한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백발이 성성할 때쯤이면 대개들 현역이나 일선의 직업전선에서 은퇴하여 사회활동으로부터도 거리를 둔 생활을 할 때인데, 누구보라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을 한단 말인가. 젊은 시절의 까맣던 머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흰머리로 바뀌어가는 자연의 이치가 한 인생의 과정일진데 구태여 한달에 두~세번씩 염색을 해야 하는 불편함과 귀찮음, 금전적 지출을 스스로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단다. 그의 나이 이제 칠순을 넘긴지도 4년이 되었고…….이제는 나다운 나, 손주녀석들에게는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게 됐고, 그 또한 본래의 자기 모습을 찾아 마음조차 흐뭇함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와 더불어 염색을 함께하며 지냈던 그의 부인 K여사도 이번에 그와 함께 하얗게 된 백발을 염색하지 않고 본래의 그녀 모습, 할머니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여 주인공 오드리 헵번의 얼굴을 보면 주름하나 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천사 같은 여인의 모습이다.
그 당시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고 모든 남성들의 공적인 연인이기도한 그녀,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화면에 천상의 미소를 지으면서 춤을 추는 모습은 요정의 모습 바로 그대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 인터넷이나 뉴스의 화면을 통하여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은 얼굴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잡히고 머리는 하얗게 백발이 된 할머니가 빈민촌의 아이들을 안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할머니는 화려했던 시절 ‘로마의 휴일’ 주인공이었던 오드리 헵번의 실제모습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며 사랑을 전하다가 세상을 떠난 여인이다. 그녀의 두 모습을 영상을 통하여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습니다” 이렇게 그녀의 아름다움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취재한 어느 리포터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너무나 주름이 많아지고 초췌한 모습에 머리까지 하얗게 변하다보니, 그 옛날 젊은 시절의 예쁘고 화려했던 그녀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그 기자는 “머리라도 까맣게 염색을 한다면 다소나마 지금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일언지하에 No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이 “검은머리로 만든다고 나의 인생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나의 흰머리는 자랑스러운 나의 인생의 훈장입니다” 라고 했다.
현대생활의 바쁜 틈바구니 속에서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열심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갖추고 싶어 열심히들 노력한다. 그중의 일부가 하얗게 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는 일이다. 염색의 목적은 더 낫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그리고 더 젊게 보이려고…….남들에게 흉측스럽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등등의 이유와 목적이 다양하다.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을 열어주는 것이 염색이고 본질은 변신이다. 염색은 삶의 운명적인모습을 뒤로한다. 사람과 함께 세월을 공유하고 자연의 순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네의 삶이지만, 염색은 이에 반하는 지혜와 생활의 이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꿈은 환상으로 끝날 수 있다. 여기에 우리네 인간들의 몸부림이 있다. 영원을 찾고, 여백을 찾고, 아름다움을 찾으며 젊음을 찾는다. 염색이 설 땅은 바로 여기다. 잠시의 변신인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서툰 인생의 붓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안도일 뿐이다. 영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 남을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한다. 사람들이 굳이 염색을 하는 것은 누구를 속이려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감추려는 의도도 아니다. 그러나 이곳저곳 몸 주위를 낫에 베이고 연장에 다치고 한 그 상처가 농부에게는 영광의 훈장이듯이, 백발은 오드리 헵번의 말처럼 우리네인생의 삶의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늙어서 얼굴은 주름이 잔뜩인데 머리만은 까맣게 젊은이의 머리색깔을 보여주는 것도 보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많다. 세월은 훔칠 수가 없다. 일시의 멈춤인 염색은 세월을 당할 수가 없다.
그 세월을 법정스님은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가고 오고 변하는 것 일뿐이다’라고 세월과 인생에서 적고 있다. 그래서 세월이란 거스를 수가 없기에 지나고 나면 모든게 아쉬워질 수밖에 없다. 요즘은 염색이라는 인위적인 방법대신 자연스럽게 늙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국의 외무부장관인 강경화씨를 비롯해 IMF총재인 크리스틴 라카르드, 영국총리 테리사 메이,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인 재닛 엘런 같은 다국적 롤 모델들이 거울 앞에서 자기의 나이든 모습을 한탄하는 대신 하얗게 센 머리마저 사랑하고 자랑하라고, 그리고 당당해지라고 외치고 있다.
염색을 한 머리와 자연적인 흰머리, 그대로의 두 부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지만 거짓으로 포장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포장된 나의모습을 사랑한다. 백발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건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얼마전만해도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건 게으름이나 자기방치 같은 상징으로 읽혔다. 부모의 하얗게 센 머리에 염색약을 발라주는 자녀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가족광고의 클리세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녀라면, 부모의 흰머리를 가리는 대신 훈장과도 같은 흰머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가끔씩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흰머리 염색 안하시느냐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의 흰머리 백발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삶, 그 자체라고……….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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