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기행문 44> 자메이카(Jamaica) <1>

<김명열 기행문 44> 자메이카(Jamaica) <1>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크루즈여행은 일반여행과는 달리 바다 위라는 독특한 공간의 틀 안에서 여행을 함께하는 동반자(가족이나 친구,친지)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보다 친숙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승객들과 서로의 문화를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짧은 시간이지만 크루즈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귀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소수의 인원이 이동만을 함께하는 일반 여행과는 달리 다채로운 파티와 게임을 통해 국적이나 언어에 관계없이 많은 경험과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경매에 나오는 작품을 둘러보며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낮에는 크루즈 회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따라 밖으로 나가서 선택한 프로그램에 의하여 하루의 일정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에 따라 원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크루즈선내에 머물면서 선내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으며 유유자적 평화롭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크루즈선내에는 각종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어서 자기의 선호도에 따라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즐길 수 있다.

크루즈선내의 밤 문화는 매우 화려하고 소란스러우며 시끌벅적한 속에 축제분위기를 연출하며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속에 우리들 일행도 몸을 맡긴 채 이것저것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웃고 즐기며 밤이 늦도록 놀다가 지친 몸으로 숙소로 향했다. 내일은 자메이카에 도착하여 관광을 할 예정이다. 우리들이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거대한 크루즈선은 밤새 항해를 계속하여 이튿날 아침에는 자메이카에 도착하여 하루일정에 대비하고 있었다.

자메이카는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의 섬나라이다. 쿠바, 멕시코, 아이티와 가깝다. 자마이카의 역사를 본다면, 남아메리카 출신의 아라왁과 타이노 토착민들이 기원전 4천~1천년사이에 자메이카에 정착을 했다. 149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특히 현재 구 항구로서 알려진 가장 인구가 많이 형성된 자메이카의 남해안과 함께, 추장이 다스리는 200여개이상의 마을이 있었다. 타이노족들은 영국이 섬을 접수할 때까지 자메이카에 살고 있었다. 1494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래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하에 노예 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783년에 영국은 탈출노예들과 화평을 맺었으며, 100년 후 영국의회는 섬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많은 해방노예들은 독립적인 농부가 되었다. 1944년 새 헌법이 자메이카에 자치정부를 승인했고 1962년에 독립하여 영국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자메이카는 카리브해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고 영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자메이카는 블루산맥의 본산지이며 좁은 평원으로 둘러싸여있다. 모든 주요도시와 마을이 해안에 있다. 주요도시로는 수도인 킹스턴을 비롯해 포트모어, 만데일, 오초리오스, 포트 안토니오등이 있다. 인구수는 2016년 현재로 285만정도이며 전체인구의 54.8%, 즉 절반정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사탕수수와 보리농업의 시작으로 농업시장의 길을 열기도 했다.

자메이카는 세계적인 육상 강국이며 우사인 볼트가 대표적인 육상스타이다. 그 외에도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로 이주한 육상선수들도 많이 있다.

쿠바남쪽 9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달걀모양의 섬 자메이카는 19세기 서인도제도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40만여명의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매매되었던 슬픈 역사의 땅이다. 콜럼버스가 이 섬을 발견할 당시 ‘눈을 사로잡는 가장아름다운 섬’으로 묘사했던 이곳,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지만, 자메이카는 자유의 축배대신 세계의 정치논리 앞에 연거퍼 쓴잔을 마셔야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고 가난은 그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소요와 폭동, 그리고 투쟁으로 치닫는 정치상황역시 자메이카를 더욱 고립시켰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메이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그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자메이카는‘아락왁 인디안’말로 ‘물과 나무가 많은 나라’라는 뜻이다.

자메이카의 상징 블루 마운틴(2,256m)은 한때 자유를 찾아 도망친 노예들이 스페인과 영국의 군대를 피해 집단을 이루고 살던 보금자리였다.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후 1655년 영국에 빼앗길 때까지 자메이카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당시 자메이카의 원주민인 ‘아락왁 인디언’들은 스페인인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한 갑작스런 생활터전의 상실, 그에 따른 적응력부족, 등으로 거의 전멸했다.

유럽인들은 인디언의 전멸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와 충당했다. 농장주들은 아프리카 노예 중에서도 가장 강인하고 우수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자메이카로 데려왔다. 그러나 뜨거운 태양아래서 하루 종일 사탕수수를 베거나 바나나를 수확하는 일은 아주 고된 중노동이었다. 때문에 얼마 안가서 탈진하여 죽기가 일쑤였고 노예들 중 일부는 혹독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도망쳐 험준한 산악지대에 숨어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마룬(Maroo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망쳐 들어오는 마룬의 인구는 계속 늘어 그들은 부락을 형성하고 군대적 조직도 형성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룬들은 그들의 거처와 가까운 농장부터 백인들과 생존의 투쟁을 벌이면서 검은 피부를 가진 그들의 슬픈 영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자메이카의 음악문화는 유명하다. 특히 밥 말리로 상징되는 레게(Regge)음악은 뉴욕의 할렘에 비유될 정도로 비참한 킹스턴의 빈민굴 출신인 밥 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체 게바라의 위상이 그러하듯 그는 자국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에게 영적지도자로 각인된 슈퍼스타다. 레게를 통해 평화작인 혁명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밥 말리와 레게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밥 말리의 사상적 밑거름은 자메이카 흑인의 토속신앙인 ‘라스타파리아이즘=고향이자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인종차별과 억압, 그리고 정치적인 불신 등 약자들이 겪어야할 울분들이 융합되어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폭정과 압제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 밥 말리는 ‘희망의 벽’, ‘(음악의 구세주’였다. 뇌종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보다 사후에 더욱 유명해져 전 세계 음악인과 팬들로부터 레게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1077 myongy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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