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 명화속에 흐르는 복음4
“설명되지 않는 고난을 지날 때”
목회를 하면서 참 이해가 안 되고 안타까운 경험들이 있습니다. 신실한 성도의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저렇게 하면 잘 안 되어야 하는 가정이 오히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볼 때입니다. 인과응보의 공식과 원리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번 주 아내가 병원에서 한 사람을 상담했습니다. 작년에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후 남동생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범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이 집에 불이 나서 죽었습니다. 일주일 전 사촌이 사고로 죽어서 장례식에 갔다 왔는데 장례식 갔다 온 다음 날 자기 시누이가 음주운전 차량과 사고가 나서 죽었습니다. 2년 사이에 집안에 장례가 다섯 번이나 났습니다. 여자분이 공황에 빠져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의지를 갖추고 가까스로 자신을 붙잡는 중에 묻습니다. “우리 집은 교회, 일, 집 밖에 몰랐습니다. 저는 술 담배도 하지 않았고, 클럽 가서 파티하고 놀고 그러지도 않았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신앙생활, 직장생활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우리 집에 일어나는 걸까요?” 마지막에 그 여자가 무너집니다. 펑펑 울면서 하나님이 무슨 뜻이 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왜 이런 고통이 왔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인생에 찾아오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두 종류로 나누면 ‘설명할 수 있는 고난’과 ‘설명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과연 두 고난 중에 어떤 것이 훨씬 고통스러울까요? 설명되지 않는 고난입니다. 설명되는 고난은 그나마 낫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돼서 해석이 되니 그렇습니다. 뭘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났으니 그렇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 것이니 설명이 명쾌합니다.
정말 아프고 괴로운 것은 설명되지 않는 고난입니다. 뿌린 게 없는데 거두게 되는 아픔. 잘못한 게 없는데 당하는 슬픔.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닌데 갑자기 호랑이가 덮치듯이 나를 덮쳐 찢어놓는 고난입니다. 설명이 안 되기에 훨씬 더 아픈 것입니다. 과연 이때 믿음은 무엇인가요?
성경에 욥기를 보면 설명되지 않는 고난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정도였으니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사탄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욥이 이유 없이 그런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게 있으니 그렇다고. 잘 믿으면 축복 받을걸 아니까 그런 거라고 합니다.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연 이 공식을 깨도 욥이 믿음을 지킬지 보자고 합니다. 이후 공식에 맞지 않는 고난의 피바람이 욥의 삶을 할퀴기 시작합니다. 처참하고도 완벽하게 무너트렸습니다.
간혹 아무개님이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믿음 좋다는 것이 무조건적입니까?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가요? 저의 솔직한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분명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바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조건적이기가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좋은 믿음’ ‘강한 믿음’ 이라고 하나 얼마든지 인과응보의 원리에 어긋나는 고난을 만나면 급속히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한 약하디 약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주제와 관련한 명화를 봅니다. “욥과 그의 아내”라는 작품입니다. 프랑스의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는 17세기 바로크(Baroque)시기에 활동한 화가입니다. 이 작가의 특징이 촛불을 항상 등장 시켜서 서로 다른 대비를 만듭니다. 이 그림에서도 보면 화폭 가득히 욥과 그의 아내가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순간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촛불이 자리합니다. 비단옷을 차려 입은 욥의 아내의 찬란한 모습과 대비해 아픔으로 위축된 반나체의 욥이 쭈그리고 앉아있습니다. 이때 욥은 사탄의 두 번에 걸친 타격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식들을 몽땅 잃었고, 재물을 잃었고, 동시에 자신의 몸에 악성 부스러기 종기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깨진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내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쉬고 있는 욥의 숨통을 찌르는 비수 같은 말을 던집니다. “당신이 이런데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설명되지 않는 고난 속에 인간의 존재와 영혼이 타격 되어 무너지는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위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에 소금이 뿌려지는 아픔이 촛불을 중심에 두고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자 이 순간 이 그림 속에 여러분을 넣어보세요. 욥의 자리에 여러분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립니다. 생각 자체가 악몽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과연 내가 저기 욥의 자리에 있다면 과연 나는 믿음을 지킬 수가 있는가? 설명되지 않는 고난의 타격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가?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내 공로인 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분은 믿음이 좋습니다. 이분은 믿음이 약합니다.과연 그러한 구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간이 아무리 잘 믿는다 한들 뭘 얼마나 잘 믿습니까? 당장 오늘 욥과 같은 시련이 닥치면 어찌할 줄 몰라 믿음을 팽개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우리가 믿는다 하나 이 모든 것의 근간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울타리가 되어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기에 믿는 것일 때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게 내 힘으로 믿는 게 아닙니다. 믿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 믿음을 유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이 시작된 출발점과 중간 점 그리고 종착점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복음의 진리가 뭔가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조차도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좋고 강해서 구원 받을 정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믿음의 근간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채우고도 충분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입니다.
욥기서의 주제가 ‘욥의 믿음을 본받자,’ 아닙니다. 욥의 믿음 정도까지 가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간다 한들 무너집니다. 욥기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욥의 친구들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인과응보의 원리나 교리나 공식 따위에 메이거나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이 가지는 신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여기에 감히 인간이 무슨 말, 무슨 설명, 무슨 반론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설명되지 않는 고난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공식에 맞지 않는 고통을 지나야 할 때가 가장 서럽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와 내 믿음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설명되지 않는 극한 고난을 지나는 당신에게 오늘 이 한마디가 힘이 되기를.
김호진목사 (올랜도 연합감리교회 담임)<1069/0503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