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고향의 진달래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계절이 보편적으로 늦게 찾아오는 시카고지역에도 쌀쌀한 날씨 속에 요즘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저렇게 피어난 개나리꽃을 바라보니 옛날 나의 고향에도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꽃이 생각난다. 이맘때의 나의 고향은 이미 개나리꽃은 한물가고 그 뒤를 이어 진달래꽃이 온 산마다 아름답게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을 것이다.
내 고향마을 뒷동산, 해마다 이때가 되면 온 산들이 핑크빛 물감으로 도배를 한 듯 진달래꽃의 만발로 온통 분홍치마를 입고 꽃 잔치를 벌인다. 이 진달래가 지고나면 이네 질새라 진달래의 사촌격인 철쭉꽃이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철쭉꽃을 먹으면 큰일 난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어 다행히 용케도 철쭉은 제쳐놓고 진달래꽃만 골라 따먹으며 온종일 산에서 보내곤 했다. 내 고향마을에서는 진달래를 진달래라 부르지 않고 창꽃이라고 대개들 부른다. 꽃잎을 따서 한주먹씩 입에 털어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꽃물이 향긋한 내음과 함께 목구멍 속으로 스며들면 상쾌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주전부리가 아이들에게 별로 없었기에 봄이 되면 칡뿌리와 함께 이 진달래꽃은 주전부리와 간식용으로 최고의 인기품이었다. 키가 커가고 성장해가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알게 되었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와 유학을 하면서 봄이 되면 내내 이 진달래(창꽃)를 잊지못해했다. 군대시절 어느 해 봄인가 산악훈련을 갔을때 온 산을 핑크빛으로 물들인 진달래를 한 움큼씩 따먹으며 목마른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서나 이 진달래를 보기만하면 나의 가슴과 머릿속에 옛 고향이 환히 열린다. 시간이나 장소의 구분도 없이 선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향 30여 가구 1백여명의 동네사람이 가족처럼 정답게 지내는 나의 고향마을, 초가들이 옹기종기 따개비 얹어 놓은 듯이 정겹게 자리한 아늑한 마을 앞에는 발가벗고 멱감던 맑은 내가 흐르고 그 냇물을 사이에 둔 확트인 벌판, 한여름에는 무성하고 짙푸른 녹색의 물결로 논밭이 출렁이고 가을이면 누런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사이 논두렁길을 따라 사이다병을 들고 볏닢에 붙어있는 메뚜기를 잡아넣느라고 여념이 없었든 손녀시절의 내 고향마을……..보또랑에서는 붕어와 미꾸라지를 얼게미로 잡아 담으며 흐뭇해하던 재미난 시간들……닷새마다 장이 서면 마을어른들이 줄을 지어 장길을 가시던 모습들, 하얀 두루마기차림의 행렬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가지붕위엔 하얀 박이 보름달보다 더 커져서 넝쿨 따라 주렁주렁 열려있고, 토담위에는 초롱불 같은 노란 호박꽃들, 담장 곁으로 줄지어 늘어선 감나무에서는 가을이 되면 해마다 어김없이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열려 천자만홍으로 물든 감나무 이파리가 조화를 이뤄 새파란 하늘밑에 햇볕을 받아 수줍은 듯 홍조를 띄고 미소 짓고 있다.
앞마당 멍석위에는 빨간 고추가 널려있고,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로 둥근달이 떠오르면 저녁을 먹고 난 동네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농사이야기며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들로 그렁그렁한 음성의 소리가 창호지 바른 문밖으로 새어나온다. 희미한 석유등잔불 아래서 장화홍련전을 밤늦도록 읽으시는 할머니의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슬려있는 모습도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로 사라져갔다.
머나먼 타국 땅, 이역만리 미국 땅에 와서 살면서도 힘들고 지친 이민 생활 속에서, 머리와 가슴속으로 나를 일으켜 고향으로 안내해주는 이정표는 바로 이 진달래이다. 해마다 이맘때 봄이 되면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진달래로부터 소중한 고향산천을 잊을 수가 없다.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은 꽃샘추위로 아침저녁 싸늘한 바람이 품안으로 들어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봄이 되면 24절기중의 하나인 곡우(穀雨)를 전후로 하여, 그 앞을 이른 봄, 그 뒤를 보통의 봄, 또는 늦은 봄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을 산촌에서 자랐던 사람이라면 이른 봄 뒷산에 올라 잎새보다 먼저 연한 분홍색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만났던 기억(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달래꽃은 우리나라 산과 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꽃이고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꽃이다. 또한 선인(先人)들의 생활문화와 풍속들이 진달래꽃과 함께 이어져온 것도 많다. 옛부터 음력으로 삼월삼일날을 삼짇날이라 하여 이날이 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이날이 지나면 날씨가 한결 따듯해져서 산에는 온통 핑크빛으로 피어난 진달래꽃의 화무(花舞)로 인해 봄의 축제가 절정에 이른다. 따듯하고 화창한 봄날 진달래꽃이 피면 시골의 아낙네들은 꽃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기름에 튀겨서 간식으로 먹기도 하였다. 이 진달래꽃잎으로 만든 술을 두견주라 하였으며 산과들로 이웃과 함께 꽃구경 가는 날 노래와 춤을 추며 하루를 즐겼던 들놀이를 화전놀이라 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고향의 봄’ 노래의 말 속에서 이 진달래가 들어있고, 김소월의 시에도 약산 진달래꽃이 나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을 잔잔히 적셔주곤 한다. 이렇게 진달래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옛날을 회고하는 감정을 상징으로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관여한 꽃으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쉼터에도 항상 등장하는 꽃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진달래는 특별한 그리움의 꽃으로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 이런 진달래꽃을 숱한 고난과 비애를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민족의 기질과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진달래는 메마르고 천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꺾이고 송두리째 잘려나가도 모질게도 땅에 뿌리를 밖고 억세게 피어나고 또 피어나서 라고 한다.
하지만 유년의 추억을 새롭게 하는 진달래를 그리며, 분명한 것은 내 어릴 때 놀았던 뒷동산의 진달래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인 ‘창꽃’으로 내 가슴속의 동산에 피어있다. 산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그 꽃잎을 땅에 떨구지만, 내 가슴속 동산의 진달래는 영영 시들줄 모르고 오늘도 내 가슴과 머릿속 깊은 곳에서 곱게 곱게 피어나있는 것이다. myongyul@gmail.com <1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