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 기행문 <35> 리틀 락, 중앙고등학교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

김명열 기행문 <35> 리틀 락, 중앙고등학교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

여행작가 및 칼럼니스트 / myongyul@gmail.com

미국의 16대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 후, 공식적으로 미국의 노예제도는 폐지됐다. 그러나 실제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 여인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목이 매달리는 흑인은 노예해방 이후에도 많았었고, 투표소에 나타난 흑인의 집이 불타고 부서지는 것은 비일비재해서 사건 측에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은 흑백이 평등함에도 ‘분리’가 법적으로 보장됐다는 사실이었다.

1896년 퍼커슨이라는 이름의 흑인은 유색인종 전용칸으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했을 때 그는 ‘인종격리 차량법’위반으로 고발되고 만다. 이로 인해 퍼커슨은 대법원에 이법에 대한 위헌소송을 냈는데 대법원은 ‘분리했을 때 각각의 시설이 똑같으면 괜찮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그 후 수십년동안 기​​차에서, 식당에서, 화장실에서, 버스에서 등등 일상적인 인종분리가 시행되는 근거가 되었다. 한방울의 피가 섞여도 유색인종으로 분류하는 ‘One drop’의 법칙도 일상적으로 통용됐다. 예를 들자면 1984년 루이지애나 법정은 230년전 프랑스노예 농장주와 흑인노예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이들의 후예라는 이유로, 어느 누가 봐도 완연한 백인의 여성을 흑인으로 판정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과거 자기의 선조가 흑인이었고 자신은 그의 후예로서 흑인의 피가 섞여있다고 하여 흑인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분리지만 평등하다’는 판결, 불평등한 사실이 엄연한데, 백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되었던 이 판결은 결국 수십년이 지나서야 뒤집어지게 된다.

집에서 가까운 백인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 거리를 통학해야했던 흑인 린다 브라운이 소송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1954년 미국의 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린다.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논리는 이제 공교육분야에서 설자리가 없다. 분리한 교육시설은 태생부터 불평등하다. 공교육에서의 흑백 분리교육은 철폐하라. 이것은 실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은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다.

이것을 계기로 일반 백인시민들은 물론 정치인들까지도 흑백통합 반대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아칸소주는 그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로 인해 아칸소주의 주도(州都) 리틀락의 Central High School은 일약 태풍의 눈

이 되었다. 흑인학생 17명이 입학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학교위원회는 대법원판결을 받아들여 이들의 입학을 수용하려했으나 학교 내외의 반발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흑인학생들이 학교에 나타났을 때 백인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아칸소 주지사는 한수를 더 떴다. 총을 들고 착검한 주 방위군과 경찰을 보내서 흑인학생들의 교내 출입을 막았다. 착검한 군인들에 막히고 ‘불에 태워 죽여라’를 부르짖는 성난 백인들에 둘러싸였던 흑인여학생 엘리자베스 액포드의 회고는 슬픔 그 자체다. “나는 누구든 나에게 호의적인사람을 찾으려 애를 썼어요. 사방을 둘러보다가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나이든 백인여자를 봤지요. 잠시 그녀를 놓쳤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내 얼굴에 침을 모질게 내뱉었어요.” 17명의 흑인 학생들 중 8명은 그들의 무서운 위협에 입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9명은 꿋꿋하게 남았다. 어니스트 그린, 엘리지베스 액포드, 제퍼슨 토마스, 테렌스 로버츠, 카로타 윌스 라니어, 미니진 브라운, 글로리아 레이, 텔마 마더세트, 멜바 빌스, 이상 9명이 바로 그 유명한 Little Rock 9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브라운판결에 개인적으로는 불만을 표현했지만 리틀락 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1957년 9월25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에 낙하산으로 투하됐던, 저 유명한 Band of Brothers의 제101공정 부대원들을 리틀락에 투입했다. 이(형제단)들은 나치 독일군을 위압하던 그 기세로 리틀락 9(9명의 흑인학생들)을 호위하며 학교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UN헌장 속에서 세계인이 하나 되어 선언했던 행동기준을 어기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유엔헌장은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종교와 언어’, ‘성별과 인종에 차별받지 않음’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깊은 신뢰삼으로 아칸소주 주민들에게 호소합니다. 법 집행을 가로막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라고 외쳐주십시오”

인권의 존엄함에 반해왔던 법, 그 법에 대한 기나긴 투쟁과 그에 대한 법의 호응, 만약에 흑인들이 분리에 순응했더라면, 버스의 백인좌석이 비어 있더라도 앉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내 집 옆 담 넘어 코앞의 백인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흑인학교로 끙끙거리며 자녀를 등교시키는 것을 ‘법치국가 민주시민의 도리’로 알고 따랐더라면, Little Rock Nine이 모두 그 위협에 질려 등교를 포기했더라면 아마도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고, 애시 당초 브라운 판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법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어긋나는 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이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을 훼손하는 무기가 될 때, 법은 신성함을 잃고 그 법에 저항한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와 질서를 창조하는 영웅들로 그 성의(聖衣)를 입는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은 현재 1957년의 사건을 기념하기위해 미국의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그 역사적인 현장에 직접 찾아가 그 옛날의 일어나고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자칫 이곳, 아칸사주나 리틀락을 방문하더라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많을 것 같아 참고로 이 슬픈 역사적 이야기를 소개하여드렸다.

어니스트 그린(1941년~ 현재 살아 있음)은 1957년 알카사주 리틀락의 백인학생만을 받아들이는 중앙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냈으며, 1년이라는 시간의 인권투쟁을 벌인 끝에 1958년, 그는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며 그 학교의 최초 흑인 졸업생이 됐다. 졸업식날 중앙고등학교의 교장은 어니스트에게 그가 다칠거라는 소문 때문에 졸업식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받지만 어니스트는 폭행을 당해 맞아 죽더라도 졸업식장에 참석을 하겠다고 하여 기어이 졸업식장에 참석을 했다.

리틀락 사건을 바탕으로 두개의 TV전용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1981년 CBS의 센트럴고교에서의 위기(Crisis at Central High)와 1993년 디즈니 채널의 어니스트 그린이야기(The Ernest Green Story)이다. 그리고 1996년 리틀락 9명중 7명이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다. 2007년 미국 조폐국이 리틀락 9을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했는데 이는 1957년 가을 9명의 흑인학생들의 강인함과 결단력, 그리고 용기를 표창하고 찬사하기위해서 주조되었다. 동전의 정면에는 군인들이 동행하는 Little 9을 묘사하는 그림과 그들을 상징하는 아홉개의 별이 있고, 뒷면에는 1957년의 리틀락 센트럴고교를 묘사하는 그림이 있다. 2008년 12월 9일, 리틀락 9은 흑인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되어 자리를 빛냈다.

앞서도 잠시 소개했듯이, 만약 독자들께서도 알칸사주 리틀락을 방문할 경우 다운타운 중심지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는 역사적 사적지인 중앙고등학교를 찾아서 역사적인 인종분쟁의 사건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해보시기를 바란다. <1060>

아래사진은 리틀락 센트럴 고등학교의 역사적인 이모저모의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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