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결혼 생활

 

<김명열칼럼> 결혼 생활

중견사원으로 직장에 근무하는 K씨, 어느 주말, 아침에 일어나 일찍 친구들과 골프약속이 있어 차고에 놓아둔 골프백을 찾으니 보이지가 않는다. 분명히 지난 주말 골프를 치고 와서 차고에 잘 갖다놓았는데 보이지가않는다. 이리저리 집안 곳곳을 찾다가 못 찾고 할 수 없이 아직도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의 부인에게 골프채의 행방을 물었다. 그랬더니 부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매 주말이 되면 당신은 집안일을 제쳐놓고, 아이들하고도 놀지 않고, 맨날 골프장으로 달려가니 도대체 당신은 이집에서 뭐하는 사람예요? 내가 너무나 화가 나서 며칠 전 내다가 버렸어요.” 부인의 이 말에 K씨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리고 한마디 내뱉었다. “밖에 나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뼈꼴빠지게 일하다 주말에 한번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을 위해서 골프 치러 가는 걸 가지고 왜 맨날 바가지 긁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 당신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할 줄 모르는 악처야 악처”. ‘반드시 결혼하라.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다. 만약에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한마디로 결혼은 하되 결혼생활에 부딪치는 문제점이 많고 순탄치 않다는 것을 잘 표현해준 말이다.
이성간의 만남이 학창시절의 만남에서 연애로 변하여 장래를 약속하고, 또는 소개팅으로, 그리고 지인이나 친척의 중매나 소개로, 친구의 주선으로 등등 이렇게 만나 미래를 함께 할 행복을 꿈꾸며 결혼들을 한다. 대개가 겪는 첫사랑은 신이 선물한 단 한 번의 순수한 감정이다. 연애는 자신의 아름다운 그것의 빛깔로 상대를 유혹하며 이성의 향기에 취하지만 조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둘이서 한곳을 향하여 마주보며 이해와 배려 속에 상대의 허물보다는 장점을 찾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위로하며 둘만이 꿈꾸는 행복한 가정의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자신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웃고 행복하게 뛰어놀 수 있는 동산에는 서로가 심어가는 일상의 소박한 행복으로 채워져야 한다.
잔디와 수목 아래로 꽃밭의 향기를 쫒아 나비가 노닐 수 있는 아름다운정원을 만들어가는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지워진 역할과 의무의 짐이 아니다. 쓸쓸한 바람결에 스쳐가는 먼지 나고 자갈과 모래밭의 터로, 사랑이 머물 수 없는 동산을 만들었다면 그 책임과 몫 또한 반드시 두 사람이 져야하는 일이다. 결혼은 자신의 부족함과 능력 밖의 소망과 욕심을, 노력과 희생 없이 자신이 선택한 상대가 해결해주고 보장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특수한 계약관계가 아니므로,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하여 상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아내나 남편을, 어느 누구의 부인이나 남편과 비교하며 상대에게 탓을 돌리는 순간부터, 행복하게 이뤄가는 텃밭을 갈아엎고 불행의 씨앗을 가슴속에 파종하는 일이 된다. 그 씨앗은 탓과 원망, 미움의 양분을 먹고 자라므로 때를 놓칠새라 무성하게 자라나고 커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 커나면 잘라내기도 힘들고 그 그늘에 가려 사랑과 행복이 충분한 태양 볕을 못 받아 성장하고 생육할 수도 없게 된다. 돈이 삶의 필요한 수단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자체만을 가지고 행복과 불행의 척도와 가치로 저울질한다면 서로가 사는 날까지 자신의 함정과 무덤만을 파가는 일이 된다. 경제적인사정과 배우자의 이탈이 주는 배신과 시댁이나 자식, 제3자나 서로간의 성격차이로 인한 사소한 갈등을 키워 만든 상처받은 자존심을 이유로, 이혼을 고민하거나 선택한사람을 만날 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를 말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이 그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의 한국이나 세계적인 추세를 본다면 서로가 맞지 않아서 갈라서는 이혼의 사례가 너무나 많다. 최근 한국의 어느 기관의 조사 통계를 볼 것 같으면 결혼한 세쌍중에 한쌍이 이혼을 한다고 하니, 서로 헤어지고 갈라서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은 그 자리를 떠나며 공허함과 슬픔이 아픈 가슴으로 밀려드는 것은 양자 모두가 부정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세상에서 보면 이혼하고 새로 짝을 이뤄 전에 보다 훨씬 행복하고 재미있게 잘 사는 부부들이 무척 많이 있다. 그러나 헤어짐 그 자체는 가슴 아픈 상처의 자국을 누구에게나 안겨준다. 이혼이 원망과 증오와 불행을 끝내는 행복의 시작은 아니라고 본다. 한때의 감정과 분노가 주는 선택의결과가 멀리 남은 내 인생과 인연에 대한 고통으로 남겨지는 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행복과 불행은 자기 자신이 선택하고 만드는 것이니 꼭 100% 이혼이 나쁘다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룬 사람들의 45%정도가 이혼을 잘했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조사 통계자료도 나왔으니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는 환경과 조건이 변한다해도, 원하는 바를 자신의 노력과 희생으로 얻어야함에는 별반의 다름이 없다.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마주하며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와 꿈으로 자위하며 살아간다면 새로운 꿈과 행복은 반드시 창조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부유하다”라는 말이 아니어도 작은 것에 행복을 느낄 줄 아는 해답이 내 안에 있으므로, 긍정의 힘으로 아예 분노와 미움이라는 감정자체를 생겨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 가정에는 행복과 사랑이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는 길목에 이르기 전에 상대보다는 먼저 내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잘못을 깨닫는다면 상대역시 돌아서는 마음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서로간의 부족함은 당연하므로 단점만을 들춰내어 원망과 분노, 그리고 미움의 탑을 쌓기보다는 장점을 찾아 칭찬으로 위로해줘야 한다.
단점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할지라도 부족함을 껴안고 함께 갈 줄 아는 지혜가 먼저 필요하다. 어제는 지나간 일이므로 과거를 붙들기보다 오늘이 새로우면 내일에는 희망이 있다. 믿음과 사랑은 갖춰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부데끼는 현실 속에서 서로를 향한 불만과 욕심이 많아 보일성싶어도, 함께 놓아가는 주춧돌 하나마다. 이해로, 배려로, 용서로,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으로 바꿔가며 쌓아가야 한다. 그리하면 어느 때인가는 무너지지 않을 커다란 사랑의 성(城)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중국 옛날 고서의 사마천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보면,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힐책이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따듯한 마음으로 작은 사소함까지도 위로와 사랑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결론을 맺어본다.
문필가 / 탬파거주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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