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여름과 가을 사이 | |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
올여름은 한국이나 적도 북쪽의 지구 북반구에 몰아닥친 폭염은 유례없이 더운데다 기간까지 길었다. 옛말에 ‘가을날 더운 것과 노인 근력 좋은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말이 있다. 가을날의 더위는 언제 꺾일지 모른다는 말을 비유한 속담이다. 그런데 올여름의 끝자락은 떠날 줄을 모르는지 그저 그 말이 옛말처럼 들리기만 했다. 가을은 여름과 겨울사이의 계절로 추분부터 동지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24절기로는 입추부터 입동 전까지가 해당된다. 금년 8월7일이 입추였으니 이미 가을은 시작된 셈이다. 금년에는 입추가 지나고 열흘 후에 말복이 들어 있다 보니 늦더위는 한참을 더 기승을 부렸었나보다. 이제 여름이가고 본격적인 가을이 오려나보다. 오고 간다는 인사도 없이 천천히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계절과 계절을 섞어가며 여름은가고 가을은 오고 있다. 한여름 내내 뜨거운 태양열에 키워오고 성장시켜온 푸른 열매들을 가을은 달콤하고 성숙하게 익혀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선물해준다. 여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모든 것들을 가득히 탐스럽게 채워놓고, 가을은 이렇게 여름이 가득 채워 넘겨준 모든 것들을 다 결실을 맺혀 내어놓고 풍성하게 베풀어준다. 그래서 여름이 아름다운 건 푸르게 채우기 때문이고 가을이 아름다운 건 아낌없이 다 내어주기 때문이다. 비우기 때문에 아름다운 가을, 그래서 눈부시게 화사한 가을, 황금빛으로 채색되어가는 들녘에 아름답게 반사되어 우리의 곁에 다가온 가을은 더욱 화사함과 나른함을 더해준다. 이제 가을의 첫 문턱인 9월초가 되었으니 곧이어 머지않아 풍성하게 맺혀진 곡식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전답을 떠날 것이고, 초록은 지쳐 단풍이질 것이며 또한 과일들이 떠난 과수원의 유실수들은 갑자기 늙어갈 것이다. 채운 것들을 비우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새롭게 공간이 열릴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가을이라는 객관적 실재(實在)에 대한 저마다의 느낌과 생각은 다르겠지만 일반적 범주에서 보면 가을은 확실히 채움보다는 비움에 가까운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고 가는 것, 이것이 우주 안에 편재한 모든 사물들의 운명이다. 한계절이 가고 또 한계절이 온다. 만남의 인연이 끝나고 헤어짐의 인연이 시작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누구도 이런 우주의 법칙과 질서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것, 이것을 누구라서 피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만난 이 가을도 얼마간 머물다가 이내 떠나갈 것이다. 더 큰 만남을 위해서,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온다. 거자필반(去者必反), 우리는 떠난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이나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집착은 인연의 시간이라는 애증의 족쇄에 채워져서 여간해서 뗄래야 떼어지지 않고 끈적거리는 껌처럼 입안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우리는 가는 것을 미련 없이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어야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만이 능사이고 해결책이다.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진리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별은 마냥 두렵고 가슴 아픈 일인가?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이별은 사람을 심리적 공황상태에 이르게 한다. 절실한 인연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이별이라는 현 실태 이면의 진실에 주목한다면 이별이 마냥 회피해야할 대상만은 아니다. 이별이 없고서야 어찌 더 큰 만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가야할 사람이라면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는 것 또한 아린 가슴속의 후일의 만남을 기대해보는 희망 섞인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 때로는 이별도 아름답다. 이별은 더 큰 영혼의 성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냇물이 냇물만을 고집한다면 강물이 될 수 없고, 강물이 끝나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헤어져서 더 크게 이르고 닿는 것이다. 꽃이진 뒤에 열매가 생기는 것처럼 헤어져야 더 크게 열리고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름이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을 새롭게 만나기 위해 보내야 되는 여름은 미련 없이 보내기로 하자. 우리 곁에 찾아온 9월은 여름과 가을을 연결해주는 달이다. 대지와 강물을 뜨겁게 달구던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면 해는 짧아지고 나뭇잎은 단풍을 들여 곱게 한껏 치장을 해보고 이내 떨어져버린다. 곱게 물든 단풍, 떨어지는 낙엽, 이런 것들을 보고 시상(詩想)이 떠오를 만도 한데 실상은 다르다. 요즘에는 꿈 많고 감상적인 사춘기소녀도 단풍진 잎이 아름답다고 책갈피에 곱게 넣어 간직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스마트폰, 아이폰이 유일한 소일과 취미의 대상일 뿐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나 곱게 물든 단풍이보이고, 또 그것을 보며 옛 생각에 잠기기도하고 그것이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는 우리네인생과 너무나 닮아서 눈시울을 적실뿐이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뜨거운 바람이 떠나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면 남자들은 우수에 젖어 여인을 향해 손짓을 보낸다. 멋지고 아름다운 낭만적 로맨스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가을바람이라도 나고 싶은 심정에서일까? 공허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어서일까. 그러나 모든 여인들이여……가을남자를 조심하라. 그 남자는 당신에게 생애의 마지막사랑이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며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마음을 훔쳐갈지도 모르나, 가을바람이 난 남자는 이내 겨울바람처럼 차가워지기 쉬우니 마음속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그 바람이 틈새로라도 들어오지 않도록 잡도리를 단단히 해두어야겠다. 어느새 소리 없이 찾아온 이 가을도 언젠가는 미련 없이 속절없이 우리의 곁을 떠나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와 공허, 쓸쓸함과 외로움만 남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도 일년 4계절과 같은 인생이기에……. <10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