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 |
달력을 보니 지난 9일이 한글날이다. 조선조 제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위대하며 쓰기편리하고 우수한 한글을 만들어 그것을 기념하고 되새겨보는 날이 바로 지난 10월 9일 한글날이다.
나는 오늘도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그 우수하고 사용하기가 편리한 이 한글로 글을 쓰고 읽고 배우고 있다. 한글의 원래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였다. 이것이 바로 한글창제의 목적이었다. 우리나라사람이라면 누구나(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라는 말을 책에서 보았거나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은 훈민정음의 사용서나 다름없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책에서 세종대왕이 직접 밝힌 한글을 만든 이유이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루고자하는 바가 있어도 자신의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혀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세종대왕이 밝힌 한글창제 목적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기까지 우리민족에게 말은 있었지만 그것을 적을 글자는 없었다.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글자가 없어서 중국의 한자를 빌려 그를 변형시키거나 그대로 사용했었다. 우리말과 중국의 글자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고, 정확하고 세세한 기록 또한 불가능했다. 게다가 한자를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글자를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글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다. 훈민정음에는 이런 백성들의 고충을 깨닫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선대의 왕, 즉 3대왕인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태종12년(1412)에 충녕대군에 진봉되었고 태종18년 음력 6월, 맏형인 양년대군 제가 폐세자(廢世子)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 22세의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의 할아버지는 조선을 창건한 태조(太祖) 이성계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나는 점이 떠올라 궁금증이 생겨서 그 의문점에 대한 해석을 아는 대로 피력해보았다. 위에 설명한대로 조선조의 역대 왕들을 보면 어느 왕은 조(祖)자를 붙이고 또 어느 왕은 종(宗)자를 붙이며, 또 어느 왕은 군(君)자를 붙여서 부르게 되는데, 그 이유와 격식(格式)이 궁금하고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왕들의 이름을 보면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조 아니면 종이 붙는다. 어떤 왕은 조, 또 어떤 왕은 종이 붙으며, 더불어 광해군, 연산군은 왕이었음에도 군이 붙었다. 그이유와 원인을 짚어보고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이름, 즉 시호는 그 임금이 승하한 후 생전의 업적에 따라 붙이게 된다. 예를 들자면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커다란 업적이 있는 왕에게는 조(祖)자를 붙이고 선대왕의 치적을 이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케 한 왕에게는 대개 종(宗)자로 부른다. 요약을 해 설명을 드린다면 창업(創業)은 조, 수성(守成)은 종이 붙는다고 할 수 있다. 예기(禮記)의 공(功)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德)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는 것에 따른 것이다. 조선의 5백여년 통치 27대왕가운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의 왕만 조(祖)자를 썼다. 태조는 조선의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조자가 붙었다. 나머지 조자가 붙은 왕들은 외국의 침략을 극복했거나(선조, 인조,..그러나 극복했다기엔 좀…..)반정을 통해 왕에 오른 경우(세조)이다. 영조, 정조, 순조는 승하한 직후에는 바로 종(宗)을 썼지만 후에 조(祖)자로 바뀌었다. 조와 종은 원래 격에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어원의 표현상 조가 더 훌륭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풍기기에 이러한 이름 바꾸기가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살았을 때와 다르게 왕들에게 이런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역대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 사당,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이름을 묘호(廟號)라고 부른다. 종과 종으로 죽은 왕을 부르는 것은 삼국시대에 신라 무열왕(태종 무열왕)이 사용했고, 고려는 태조 왕건이후 죽 내리 사용하다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쓰지 못했다. 조선에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름법을 사용했다. 광해군과 연산군은 재위기간을 용상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반정으로 폐위되어 군(君)으로 봉해졌는데 본시 군은 왕자나 왕의 형제들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폐위된 왕이니 죽은 후에도 왕의 묘호를 줄 수 없다는 뜻이다. 또 다른 예로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경우 그 아들인 정조임금이 아버지를 복권시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왕과 같은 묘호를 드린 일도 있다.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빛나는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에 대하여 글을 쓰다가 조선왕조시대 왕들의 이름에 관심이 쏠려 조금은 옆으로 샌 이야기를 곁들였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고 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분이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王道)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만고에 빛나는 찬란한 문화유산인 훈민정음, 한글을 창제하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인쇄활자(독일 구텐베르가 1455년에 개발한 인쇄활자보다 앞선 것임)를 개발하여 인쇄 기술의 발달을 꾀하였으며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해 농업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군사적으로 북쪽에 사군과 육진을, 남쪽에는 삼포를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의술과 음악, 방대한 편찬사업, 법과제도의 정비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난세에 세종대왕 같은 훌륭한 제왕적 지도자가 나타나 이 어려운 난국을 살기 좋은 복지국가로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본다. myongyul@gmail.com <996/1014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