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예수 믿어야 잘산다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경교회 담임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는 고백 말고 사도바울이 잘 쓰는 표현이 있는데, ‘사도로 부름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부르심’이란 다른 말로 ‘소명’인데, 사도바울은 소명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에 ‘나는 사도로 부름 받은 자’라는 고백이 빠진 적이 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생명 내놓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 바다도, 매 맞는 것도, 추위도, 더위도,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최우선순위였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명의식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고 가치있게 하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와서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와, 걔네집은 굉장히 잘 살아, 자가용도 두 대고, 잔디가 깔린 정원도 있고, 수영장까지 있어, 그리고 걔는 10만원도 넘는 신발을 신고 다녀’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아들을 앉혀놓고 찬찬히 설명을 했습니다.
‘그 집은 부자로 사는 것이야. 부자로 사는 것이 꼭 잘 사는 것은 아니란다’
부자로 사는 것이 꼭 잘 사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꼭 못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목사님은 다음 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친구가 신고 있는 신발 신고 싶지. 그런데 왜 사달라고 안했어?’
‘사달라고 해도 어차피 안 사주실 것이잖아요’
이 때 목사님은 그런 비싼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왜 그런 운동화를 신으면 안되는 지를 살명해 주었습니다.
왜 그런 비싼 운동화를 신으면 안 됩니까?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당시 후원사에서 1억을 들여 황영조 선수의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엄청난 금액이지만 황영조 선수가 1억짜리 운동화를 신는 것은 괜찮습니다.
쓸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가 좋은 운동화를 신고 몇 초라고 기록을 단축할 수 있다면 1억짜리 운동화도 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 없다면 10만원짜리도 과합니다.
이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유가치가 높아지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소유가치는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안 믿고서 존재가치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 안 믿고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예수 안 믿고 잘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 가치는 목적에서 옵니다.
목적을 떠나 가치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존재가치는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버스를 타고 다니느냐, 자가용을 타고 다니느냐, 십만원짜리 신발을 신었느냐, 만원자리 신발을 신었느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습니다.
‘목적대로 살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가치를 묻지 않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생애의 목적이 무엇일까?’
이런 근원적인 질문 대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해서만 집중합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좋은 운동화, 더 비싼 옷을 입고 싶어하고, 어른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명품가방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991/090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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