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종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얼마 소중한 것인데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예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자유함을 얻습니다.
기독교의 역설이지요.
하나님의 종이 되면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면 종이 됩니다.
예전에 학생들과 수련회를 갔을 때 새벽에 일어나 냇가로 가는 길에 물이 조금 고인 웅덩이가 있고 개구리 몇 마리가 모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해가 뜨면 웅덩이의 물이 마르고 개구리들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개구리가 저렇게 있는면 죽는데’하니까 ‘왜요 물에서 잘 노는데’라고 하면서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기 웅덩이는 물이 별로 없어서 해가 뜨면 8월 땡볕에 금방 마르고, 그러면 개구리들은 웅덩이 위로 못 올라오고 말라 죽어’라고 설명하니까 아이들이 달려들어 개구리를 잡아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들은 죽겠다고 도망을 칩니다.
잡히면 죽는 줄 알고.
그래도 열심히 잡아서 몇 마리는 건졌는데, 몇 마리는 끝까지 도망을 가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개구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죽겠다고 도망을 했을까요?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잡히면 살고, 안 잡히면 죽은 것입니다.
잡힌 개구리는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살았습니다.
안 잡힌 개구리는 ‘휴, 이젠 살았’라고 생각했겠지만, 곧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잡으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을 피하여 도망을 다닙니다.
잡히면 죽는 줄만 알고 열심히 줄행랑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분의 종이 되면 자유를 얻습니다.
거꾸로 자유케 하시는 분에게서 자유하면 종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바울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머리로 자신이 왜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만 자유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자유합니다.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미신은 어떻습니까?
이사도 마음대로 못 가고 점쟁이에게 날을 받아야 합니다.
손 없는 날을 골라서 이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데로나 갈 수 없습니다.
동쪽, 서쪽… 방향을 잘 알아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벌벌 떱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언제 어디로 이사해야 할까요?
저에게 물으러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어디로나 이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기독교는 자유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다시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자신은 우리의 종이 되고자 하시면서 우리는 자유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 사랑 때문입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합니다.
종종 그냥 풀어놓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밖에 나오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개를 못 따라잡기 때문에 목줄을 매서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은 아이들은 묶어서 다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가는대로 좇아가면서 ‘어, 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따라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자유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유를 주십니다.
자유를 주시는 한편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990/0902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