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목사의 딸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오늘날 목사의 직임은 예전처럼 신비감을 가진 그런 존재로 비춰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앞에서 나타나는 모습으로 평가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강대상에서는 너무나 거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는 것 같은 설교로 청중들을 매료 시키지만 강대상을 내려온 많은 목사들은 강대상에서 보여준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는 괴리감이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설교는 성인군자 급이지만 삶은 시장잡배나, 그 행동은 어떤 집단의 보스 같은 그런 모습들 때문에 성도들이 갖는 헷갈림은 결국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존경심과 경외 심만을 강조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존경 받도록 행동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괴리감을 가지는 곳이 목사님을 둔 가정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요, 가정에 들어와도 목사요, 자녀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목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목사 아버지의 이중성은 아이들의 탈선을 부축입니다. 그런 목사와 아버지의 목사로 쓰시는 하나님까지도 도매금으로 매도하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 라는 자녀들의 일탈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필요한 것이지, 목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성경을 들이대고, 말씀을 여기저기 찾아 정죄하는 그런 율법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란 직임일 뿐 그것이 고유한 가치는 아니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내가 돌보고 먹이는 양들이 있을 때 목사인 것이지 가족 안에서 목사는 더 이상 아무런 존재적 의미를 부여할 가치도 없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소명을 이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가정은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일 뿐입니다.
통계를 보더라도 탈선한 많은 청소년들 중 아버지가 목사, 장로인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그냥 웃고 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부모는 이중적인 존재일 뿐이고, 그들이 바라는 아버지가 아닌 그저 목사요 장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런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결국 반항이란 자신들의 돌파구를 찾은 것입니다. 이것을 뭐하고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역하느라 바빠서…… 주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목회는 가정을 버려야 하고, 자녀들의 십자가를 내려놓아야 할 수 있기 때문에……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가족은 깨지고, 자녀들의 마음을 너덜너덜해지고,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어떤 끈도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최근에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목사의 딸’이란 책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란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부재가 말하려는 저자의 슬픔 가족사란 무엇일까?
궁금해 책을 받아 들고 난 후 단숨에 이 책을 탐독해 버렸습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교단의 어른이시기에, 신학교를 다닐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수님들이 자랑하던 분이셨기에 더 더욱 제게는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신학자 정암 고 박윤선 목사님(1905~1988)은 한국 교회의 기둥이자, 전세계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신 구약 전권을 주석한 세계적인 신학자의 반열에 오를 만 한 분입니다. 그 목사님의 숨겨진 가족이었던 셋째 딸 박혜란 목사님이 쓴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교계의 존경의 대상이며, 신 학생들에겐 신(?)적인 존재였던 목사님의 커튼 뒤에 숨겨진 가족 안에서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밝혀지지 않았던 모습이 딸의 시각으로 섬세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 책이 발간된 후 한국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고 박윤선 목사님께 배움을 가졌던 지금 한국교회의 걸출한 목사님들은 앞다퉈 이 책에 대한 반박 문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강단에선 목사로서는, 한국교계에 미친 업적으로는 고 박윤선 목사님 만 한 분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저 역시 신학생 때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전집을 사서 책장에 자랑스럽게 진열해 두었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밝히는 윤선 목사는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분이었다고” 저자는 증언합니다. “아내에게 매정하게 대했고 자녀들에게도 전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 주지 않았으며, 오직 공부와 연구, 책을 쓰고, 교회 일에만 매어 달렸던 분이셨다” 고 회고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성경적인 세계관보다는 육과 영을 구분하고 육적인 차원은 무가치하고 더러운 것으로 보는 비 성경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을 양성해 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한국교회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주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임을 잊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화를 내고 정성을 다하면 축복해 주는 샤머니즘적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 김성수 목사는 그런 한국 교회의 목사들을 빗대 “양복 입은 무당들” 이 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책이 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 박윤선 목사님의 딸 박혜란목사는 자신의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박윤선 박사의 장점들, 업적들을 동시에 기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을 빼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만들어 낸 위대한 영웅임과 동시에 시대가 만들어낸 태생적 아픔의 부산물이 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많이 아려 왔습니다. 그 자녀들의 삶 속에는 아버지의 그림은 온데 간데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몰두한 목사님만 있었던 그들의 비통함과 아픈 상처들이 제게도 아픔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가족들이 희생 되도 좋다는 논리나 그것을 변론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성경적 이론을 들이대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심지어는 열심당원 성도들은 목사와 가족들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목사를 자신들의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전하는 설교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설교를 보여주고 증명해주는 사람입니다. 삶이 없는 설교는 죽은 것입니다. 자녀들이 인정하지 않고, 아내가 인정하지 않는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먼저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다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회자의 1차 목회현장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을 잃고 얻은 위대함은 사람들에겐 약간의 존경은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가장 소중한 가치를 내 팽개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런 아버지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고, 하나님께 반항을 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는 자녀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 목사들은 일년 중 가장 많은 설교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바쁜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 중에라도 그 일이 가족들의 필요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존중함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여! 주님의 일로 혹 잃어버린 가족들은 없습니까? 등을 돌린 자녀들은 없습니까? 이 고난주간 성도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전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목사가 된다면 여러분의 설교는 이미 충분한 감동으로 성도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에게 벌릴 손을 남겨두십시오, 안아줄 팔을 남겨두십시오, 품어줄 가슴 한 켠을 자녀들을 위해 남겨두십시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며,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막히신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분입니다.
<970/0331201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