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12번째 선수 그가 경기를 주도한다.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전 축구를 그리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기억입니다. 어떤 팀과 축구 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의 동네 축구 수준의 경기였습니다. 그래서 축구도 자 모르는 저는 선수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편에 출전할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주어졌지만요, 아무튼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공을 차고, 패스를 했습니다. 그때 마침 제게 골을 넣을 수 있는 최고의 찬스 왔습니다. 누군가 제게 패스를 해주었고 저는 그 패스를 마치 매시처럼 볼 트래핑을 해서 받아 몰고 단독 드리블로 상대 골문 쪽을 향했습 니다. 완전 노 마크 찬스가 왔습니다. 이골을 넣으면 우리 팀이 이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 다. 그렇게 나름 질주하면서 볼을 몰고 가다 그만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발목을 젖 찔러 잔디밭에 나 뒹굴고 말았고 볼은 떼굴떼굴 굴러 상대편 골키퍼에게 살포시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후 한동안 발을 절고 다닌 적이 있었고 지금도 축구 하면 그때 그 생각 이 먼저 떠오르기 합니다.
브라질 월드컵은 한국축구의 끝장을 보여준 사건으로 공항 엿 사건이란 초유의 치욕사건을 맞았습니다. 이번 아시안 컵에서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공항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향한 국민들의 무한 사랑은 공항 엿 사건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 중심에 슈틀리케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이번 아시안 컵 축구는 잃어버린 축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켜 주었던 경기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승보다 값진 것을 얻 은 경기였다는 평가입니다. 저는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선수가 그 선수고, 축구 협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달 라지게 만들었을까? 그러던 중 한가지 제 뇌리 속에 박힌 영상이 있었습니다. 마침 월요일 아침에 경기가 있어서 지난 월요일 새벽에 한국과 이라크 전을 보았을 때입니다. 우중경기로 치러진 그날 경기 90분중에 제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도, 골을 멋지게 넣어 승리를 안겨준 선수들도 아니었습니다. 정작 저의 눈은 그라운드 안에 있던 11명의 선수들이 아니라 12번째 선수라 불리는 감독 슈틀리케였습니다. 저는 그의 리더십에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저 감독이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장면이 바로 비가 오는 전반45분내내, 비가 오는 후반 45분내내 불편한 다리로 그라운드 밖에 서서 비를 다 맞으면서 선수들과 함께 하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저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고 제게 감동을 주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90분의 사투를 벌이면서 연신 감독의 싸인을 눈 여겨 봅니다. 그의 말한 마디, 눈빛, 손짓하나 모든 것이 선수를 움직이게 하는 지시표시입니다. 누구나 그런 감독의 지시에 대한 표시들은 익숙하고 또 그대로 따라 반응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악 천우 가운데서 선수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뛰게 하고, 최선을 다하게 하고,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싸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과 똑 같이 비를 맞으면 서 그 자리에 서있는 감독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90분 내내 비를 맞으면서 또 다른 경기를 하고 있는 감독의 모습은 그 모습자체만으로도 선수들에게는 뛰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고, 이기고 말겠다는 강한 집념과 의지를 깨어주는 내적인 동기였을 것입니다. 사실 감독은 동기부여자라는 사실을 슈틀리케는 잘 알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어떤 기술을 하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동기를 끌어 내 줄 수 있는 것은 수십까지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그 선수를 뛰게 만들고 지치지 않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그라운드에게 뛰고 있는 축구선수들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비수로, 어떤 사람은 미드필드에서 어떤 사람은 공격수로, 어떤 사람은 골키퍼로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인생이란 그라운드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팀에 만약 코치나 감독이 없다고 가정을 해보십시오. 그 경기는 분명 지고 말 것은 자명하고, 오합지졸 되고,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 막무가내로, 룰도 지키지 않고 그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골만 넣고 말겠다고 하는 경기를 치르는 막장축구의 치졸함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이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로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좋은 선수일수록 좋은 코치를 항상 옆에 두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영혼의 코치가 없이 그라운드로 나가 막무가내로 뛰어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코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란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경기에서 지지 않고, 잘 싸우며,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비를 맞으면서 여러분을 돕고 계신 감독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인도해주고 함께 해주는 영혼의 코치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비를 맞으면 당신도 비를 맞고, 눈보라, 폭풍을 맞으면 그것을 같이 맞으시면서, 환란과 고통과 힘겨운 인생의 싸움을 싸우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 장소에, 그곳에 함께 계셔서 여러분들을 응원해주시고, 여러분들이 잘 경기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감동을 안겨주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축구 예기로 가보겠습니다. 슈 감독은 소위 천정부지의 몸값을 가진 모시기 힘든 감독 은 아닙니다. 어쩌면 냉엄한 자본주의 스포츠에는 어울리지 않는 감독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국이란 생소한 나라 국가 대표 감독을 맡았습니다. 문화도, 언어도, 기질 도, 다른 나라의 감독입니다. 특히 후진국 형의 축구가 그렇지만 권위적이고, 윗선의 결정이 감독의 결정보다 우선시되고, 감독의 선수기용의 재량보다 윗선의 입김이 더 크고, 윗선의 말 한마디에 움직여져 가는 축구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이란 나라의 감독을 자처한 것이다. 한마디로 슈틀리케는 적지로 뛰어든 전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배우게 되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감독들에 비해 자기 욕심이 많지 않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더 나은 감독직을 위해 비상하기 위해 잠시 날개를 접고 기회만 기다리는 그런 얄팍한 수를 쓰는 사람 같지 않다는 인상입니다. 조금은 인생에 초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신문에 좀 흥미 있는 기사가 있어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슈 감독은 위기의 순간이 오면 ” 축구란 원래 다 그런 거야” 라고 하는 인생을 달관한 듯 하기도 하고, 인생을 초월한 듯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가 너무도 사랑하고 애지중지하게 키웠던 맏아들을 7년 전에 잃은 뒤로 세상사에 초연해 졌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2008년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고 있을 때 장남을 폐 섬유 종으로 잃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모든 것에서, 특히 위기가 올 때마다 더 초연해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감독의 눈에는 그라운드가 보이고, 선수들이 보이고, 선수 각 개개인의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명예, 이름값,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한다면 절대 그런 감독은 그라운드 도, 선수들 개개인의 가치와 가능성도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쩜 인생의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로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붙잡은 체, 그것은 등에 업은 체, 잃어버릴까? 빼앗겨 버릴까? 걱정과 염려를 가진 체 이 경기를 치르고 있는 선수는 아닙니까? 어 나은 곳을 향해 날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 에 사는 사람들처럼 안정감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경기하는 우리의 발은 무겁고, 몸은 둔해지고, 잘 달리지 못할 것이고, 결국 경기는 패하고 말 것입니다. 내 욕심과 욕망이 내려지면 비로서 내 눈에 패스할 다른 선수들이 보이게 됩니다. <962/020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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