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진보의 과정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교회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람 중에 하나는 생색내서 일을 많이 하고도 괄시 받는 사람이란다.
돈은 돈대로 내고 돈 낸 만큼 대접은 못 받는 사람들이다.
돈 낸 만큼 대접을 못 받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들 그 사람만 보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일할 바에야 나는 안한다’고 한다.
여기서도 우리가 얼마나 시험에 들어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 사람처럼 봉사 안 하고 싶지 않은 것’ 때문에 정당하게 봉사해야 할 일도 뺏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봉사하고 생색낼 바에야 봉사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생색은 내지 말아야 하지만 봉사는 해야 한다.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어디까지 말려드는가를 보자.
어떤 분이 기도를 20, 30분씩이나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니꼽게 여겨 화가 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만 하고 말았다면 그 사람은 정당한 기도를 뺏기고 있는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결국 신자가 자비라는 요소를 가지고 그의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할 부분만큼 심각한 부분은 없을지도 모른다.
자비는 더 나가야할 부분과, 반발해서는 안 될 부분들을 구분하는 기준선이다.
한 사람의 잘못을 볼 때마다 그것을 ‘나’의 잘못으로 보라.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를 마음속으로 깨닫고 봉사하는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런 지침을 제시하고 싶다.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보통 어떻게 하는가?
뒤에서 욕을 하는가? 앞에서 욕을 하는가?
뒤에서 욕을 해야 한다.
앞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례하고 무식한 것이다.
뒤에서 욕하는 것은 그나마 양심이 있고 상식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앞에다 대고 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욕을 먹는 쪽에서는 치사하게 뒤에다 대고 욕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치사한 것이 아니다.
정신병자나 그렇게 하지 어떻게 면전에서 욕을 할 수 있는가?
뒤에서 욕을 한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욕을 하지 않고 뒤에서 욕한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명심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어떤 사건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투덜거려라.
사람들 앞에 대놓고 투덜거리지 말고 화장실에 혼자 가서 투덜거리고 나오라.
그래서 해결된다면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투덜거리기 시작하면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도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된다.
그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도 감당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감당하라.
감당하기 위해 숨어서 투덜거려라.
뒤에서 뭐라고 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에 진일보하는 실제적인 진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데 감당치 못하고 있구나’하는 생각 말이다.
‘언젠가는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체해서 그래. 신경 쓰지마.’라고 하라.
그렇게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다른 원리를 낳는다.
자신이 투덜거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투덜거릴 수밖에 없을 때를 만나면 자기에게 그 죄를 돌릴 수 없으니까 엉뚱하게도 객관성을 요구하게 된다.
즉, 다른 사람에게서 동의를 구하려고 하는데, 자신이 누구에게 투덜거리는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상대방이 욕먹어 마땅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증거를 얻어내기 위해 옆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린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그 사람을 욕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다 아는데, 그런데 이렇게 한 건 좀 너무하잖아.
성경에도 분명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자꾸 붙여서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이것만큼 힘든 것이 없다.
그러지 말라.
차라리 혼자서 욕을 하라.
욕을 하고, ‘하나님 제가 죽일 놈입니다. 감당이 안 돼서 그럽니다. 하나님, 그래서 제가 뒤에서 투덜거리겠습니다.’하라.
이것이 진보의 과정이다. <960/012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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