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아브라함에 대한 오해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하란까지 인도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은 ‘지연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다.
이 이름처럼 아브라함은 데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는대 도움을 받기보다는 더 많은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데라와 아브라함은 어떤 신앙의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그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드디어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과 우리가 구태의연하게 갖고 있었던 편견을 비교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과 그 결과의 원인을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쉽게 오해하는 것이다.
‘축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법’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불신앙이다.

아브라함의 조상은 이방신을 섬겼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들은 하란까지 와서 머뭇거렸다.
아버지 데라가 죽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창세기 12:5을 보자.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다.
이 ‘마침내’는 하나님 쪽에서 써야 하는 ‘마침내’인가? 아니면 아브라함 쪽에서 써야 하는 ‘마침내’인가?
하나님이 쓰시는 ‘마침내’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여행한 것이라면, 그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따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까지 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마침내’를 쓰셔야 한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니까 억지로 밀고 끌고 해서 드디어 힘들게 가나안까지 끌고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그가 신앙으로 순종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순종치 않은 결과라는 것을 또 한번 확인시켜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란에 다시 나타나셨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권고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신앙이 있었으면 어떻고, 없었으면 어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곤란하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의 맨 밑바닥에 무엇을 깔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인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내가 깨닫고 스스로 걸어오거나 하나님 앞에 ‘제가 졌습니다’라고 합의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다해 버텼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이다.
설득 당한 것 가운데 가장 늦게 설득 당한 것이 이해이다.
하나님은 운명부터 설득하고 그 다음에 인생을 설득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해를 설득한다.
여러분의 운명이 하나님 안에 설득 당해서 구원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여러분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하라.
그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표현하시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다.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 손에 의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자신의 근본부터 다시 정리하고 확인하기를 바란다. <955/121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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