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언제나 동일한 구원의 길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이해하는 순서는 흔히 ‘구약-예수그리스도-신약’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까?’하는 문제에서 혼란을 갖게 된다.
신약시대의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사람과 아담은 무엇으로 구원을 얻었을까?
‘구약-십자가-신약’이라는 순서는 시간의 배열에 따른 것이다.
이시간 배열은 계획 배열과는 다르다.
계획 배열이라는 말과 시간 배열이라는 말을 구분해야 한다.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획하는 것과 실제로 시간과 함께 일이 진행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집을 짓겠다고 결심했다면 어떻게 하는가?
계획 속에 집터를 정하고 설계도면을 그리고 시공을 하는 등 일의 순서를 바로잡는 배열을 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일에 들어가면 이 순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집을 짓고 설계를 하기 이전에 돈을 모은다거나 인부를 부르고 트럭을 준비한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다른 일부터 하게 된다.

이같이 일을 시간 속에서 진행시키는 것과 계획 속에 진행시키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구원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러한 시간 배열과 계획 배열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 대한 계획의 성패에 따라 구약을 주셨고, 또 그 성패에 따라 십자가를 주시는 식으로, 하나의 계획을 실행하셨다가 실패하면 또 다른 계획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일을 진행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지성에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께서 일단 생각하시면 그것이 바로 ‘끝’이다.
‘빛이 있으라’하시니까 ‘있었더라’는 것은, 빛이 있으라고 해서 그 즉시 나타났다는 그러한 뜻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게 하시겠다면 그 과정이 어떻게 되든지 결국 빛이 있고야 만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치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저기에다 집을 지어야하겠다’고 작정하고 땅을 파보니까 땅 밑에서 물이 나온다.
그러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물이 나오면 펌프로 물을 퍼내서, 원래의 계획에 없었던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국 그곳에 집을 짓는다.
계획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부작용도 다 처리하고는 마침내 집을 짓고야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어 놓으시고, 아담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으로 그에 대응하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이 실패하니까 또 다시 계획을 세우시고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한번 세우신 계획은 꼭 이루고야 만다는 것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이미 생명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담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종국적으로 완성되는 창조의 작품이었다.

아담 창조 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그 창조 완성의 마지막 관문이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은 마지막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완성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없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훨씬 아름다운 방법으로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계획 아래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구약 성도들이 지켰던 제사제도를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예수의 사역과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을지라도 구원 얻은 사람이 가지는 마땅한 생각과 심정이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었다.
그 생각과 심정이 잘 표현된 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속하는 모형으로 가르쳐주신 제사제도였다.
구약 성도들이 제사드릴 때 아무 생각없이 그냥 제사형식에 참여해서, 단지 제사에 참여했다는 행위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생명의 죽음이 필요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제사제도를 통하여 양이나 소를 피 흘려 잡음으로써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죄 지은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심정을 갖게 하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대신 누군가에게 죄값을 미루어야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제사에 올려진 양이나 소가 대신 죽었다는 심정을 가지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두 자기 분명한 사상과 심정을 가졌다.
하나는,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그 죄값으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심정이고, 또 하나는 ‘내 죄의 용서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내 대신 누군가 심판을 받아 죄값을 치러 주어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대속사상이다.

그런데 제사에 참여하면서 인간의 생명보다 못한 양이나 소가 죽었다고 인간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실제적으로도 매년마다 이 제사가 반복되었다는 사실로도 그 불완전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값이 대신 치러지기 위해서는, 장래에 양이나 소가 아니라 인가보다 더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어야 할 것임을 믿고 자기 대신 죽어주는 그 사실을 의지하는 심정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의 명백한 성격과 본질을 알았을 뿐더러, 자기 대신 죽어줄 그 생명을 의지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고 할 때, 단순히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도와 같이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시간에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유일한 것이다. <954/120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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