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꾸러기의 짧은 글 긴 생각> 구원을 감지하라

이경규목사 / 서울 새로운 성결교회 담임
믿음을 갖고 회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한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최초의 인식이고, 최초의 경험이며.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체계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기초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의 기초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결과로 생긴 첫 감각일 뿐이다.
감각하는 나는 이미 살아있다.
내가 예수를 믿었든지, 회개했다는 것은 살아난 증거에 불과하다.
살아서 맞이하게 된 첫 경험이지 살아나게 된 조건이 아니다.
이 대목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구원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첫 감각에 불과한 것이며, 이미 살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자.
구원을 얻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불의한 사람인가?
바꿔 말해 의로운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불의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
정답은 불의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불의했던 사람이 구원을 받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 때는 다음 중 언제인가?
첫째, 불의한 사람이 의로워지려고 노력을 시작한 때
둘째, 그 노력을 통해 이로워진 순간
셋째, 불의한 상태로 있는 시점
정답은 세 번째이다.
즉 불의한 상태에 있을 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죄인이 회개할 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불의하다는 것, 죄인이라는 것을 성경은 ‘죽었다’고 표현한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얻은 구원의 조건이 그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다.
제 앞에 시체가 있습니다.
제가 그 시체에게 ‘야기서 20미터 앞에 있는 고목나무까지 30초안에 가면 살려주겠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시체는 어느 시점에서 살려준 것입니까?
그 시체가 고목나무로 가는 동안 살아난 것인가 아니면 목적지까지 가서 살아난 것인가?
이 말은 모순이다.
시체가 어떻게 말을 알아들으며,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구원의 문제에서도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은, 시체가 살아나기도 전에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시체는 일단 살아나야 한다.
그 시체가 다리가 하나밖에 없거나 아예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나면 굴러서라도 갈 수 있다.
이 비유를 통해 구원의 조건은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문제임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시체에 불과하다.
이것을 모르고 오해하면 헷갈리는 것이다.
‘튼튼한 시체와 병든 불구자 중 누가 빠른가?’
‘죽은 나폴레옹과 동네 강아지와 누가 더 무서운가?’
전자는 죽었고 후자는 살았기 때문에 후자가 빠르고, 후자가 무섭다.

로마서 4:5에서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다.
즉, 경건해질 각오를 했다든지, 경건해지려고 노력했다든지, 경건해졌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이다.
경건해지는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것을 로마서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경은 로마서 4장과 5장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감각이 있기 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종동 ‘내가 저쪽 상수리나무까지 달려가는데 늘 5등 안에 못 들더라. 늘 뒤쳐지더라. 나는 아마 시체인가봐’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가곤 한다.
이것은 신자들의 오해이고 ‘병’이다.
달리는데 있어서 등수 안에 드는 것은 살아난 다음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후의 성장에 관한 문제와 구원 얻는 문제를 혼동한다.
성장부분에서 부끄러운 꼴을 당한 것을 가지고 자기의 구원에 대해 회의한 나머지, ‘저는 교회를 떠나 교회 밖의 변변치 않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해서 5등 내에 들어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하면서 떠난다.
그런데 밖에 나가보면 또 밖의 사람들과는 달라서 ‘나는 역시 믿는 사람이구나’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는 또 다시 뒤쳐진다.
이렇게 가고 또 다시 오는 이런 짓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이유는 구원 문제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4:6 이하를 다시 보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와 7절부터 있는 말씀은 시편 32편에 있는 말씀이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보면 ‘회개하는 자는 복이 있고 주를 앙망하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는 볼 수 있다.
신자의 성장단계에는 회개 없이 용서가 없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원인이 없이 그냥 용서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얻은 후, 그 다음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때 ‘이것은 네가 잘못한 것이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거라’는다짐을 우리에게서 받으신다.
그런 후에야 용서해주신다.
그래야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안목이 자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성장 영역에서의 용서와 지금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있는 축복들, 즉 죄인들이 죄사함 받고서 구원 얻는 자리에 들어온 것을 말하는 대목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두 영역에서 쓰는 단어는 같다.
두 영역에서 모두 ‘믿음’과 ‘용서’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영역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구원을 얻는 자체에서는 우리에게 원인이 없으나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우리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다윗은 시편에서, 이 문제에 관해 기록함으로써 구원의 방법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계획이요, 약속이요, 방법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953/120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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