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

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다니는 지금의 교회는 진짜 교회가 맞습니까?
물론 ‘교회란 이런 것이다’ 라고 신학적 용어 진술로는 누구나 교회가 어떤 곳이고,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론적인 장황한 설명은 조금만 배우고 신학의 문턱에만 갔다 왔어도 충분히 논쟁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물론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종교에 관심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장황하게 하나님에 대해 설명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닫혀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시대가 아닌 지금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열린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지각이 깨어나고 지식의 수준이 하늘을 찌르고, 인터넷 자판만 두들기면 쉽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실로 말씀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시대가 만들어 내고 있는 어떤 존재를 마치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믿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더 증폭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은 하나님께서 진짜 그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이 가르침 받으신 그 하나님이 정말 성경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 맞습니까?
혹 여러분이 읽는 책 속에서 만나는 어떤 하나님은 아닙니까? 혹 목사의 설교 안에 서나 겨우 한 주에 한번 만나는 그런 주말 부부 같은 남편은 아닙니까? 그 안에 갇혀서 아무 생각도 믿음도, 확신도 없이 전달되는 짜증나게 하는 공해 같은 하나님은 아닙니까?

정말, 정말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 아십니까?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어떤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감옥에 갇혀 있는 종교적 죄수들에 불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가 만들어낸 감옥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 이 종교라는 감옥에 들어가 버린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갇힌 체 그것이 진짜 내가 믿는 것인 냥, 하나님인 것처럼 믿게 만든 것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습관은 그대로 유지한 체 행동하지만 그 안에는 진짜 하나님은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또 하나의 어떤 존재 이스라엘이 모세를 대신해 그들을 인도해 줄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서 금송아지를 그들의 인도자로, 신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 하나님이란 존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의 영은 무서운 겁니다. 그 종교의 영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진짜 하나님을 자신의 종교 안에 가둬버리고 종교가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을 우리로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이 지은 기가 막히고 화려한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둬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 입니다.

아모스9장11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이 말씀을 사도행전15: 16에서는 이 후에 내 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진 것을 다시 일으키리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한 다윗의 장막을 쓴 토미테니의 해석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는 모세를 통해 지으신 원형 성막을 원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어마어마한 금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은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필 가건물로 대충 바람과 비만 피할 수 있게 지어놓은 다윗의 장막을 복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건물은 그분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멋진 건물, 화려한 건물, 눈이 휘둥거릴 만한 건물을 복원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물에 모든 신경과 관심과 돈을 투자 하려고 합니다. 웅장하고, 모던하게, 극장식으로, 사람들이 와서 예배 구경하고 관람하기에 편리한 시설로, 조명도 가장 멋지게 지어 소위 하나님께 헌당이란 것을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믿고 말입니다. 교세가 조금 커지면 너도 나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바람이고 원하는 것인 냥 건축에 목숨을 걸고, 건물 구입에 빚을 냅니다.

아모스와 사도행전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지금 우리가 취하고 있는 행동은 얼마나 다릅니까? 얼마나 이질적입니까? 아니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이지요? 이것은 파괴적인 행동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가 그들의 편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이 잘못되고 건물을 가진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초대교회는 건물중심의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은 우리의 영안에 짓고 싶으셨지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 의 것들로 짓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건물에 갇혀버리면서 종교가 돼버렸고, 하나님을 건물 속에 가둬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가 세상을 향한 질주하는 강인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에 장애 와 벽과 제한선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혹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 진정한 예배, 하나님만 오직 유일한 청중이 되어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나가는데 수많은 걸림돌들과 칸막이들과 장벽들, 휘장들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십니까?
직분이 그분께 나가 다윗처럼 춤을 추며, 날마다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장벽이 됩니까? 체면이, 사회적 신분이 하나님께 나가 맘껏 그분이 원하고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만드는 벽입니까?
아니면 주머니에 돈이 너무 많아 춤을 추며, 뛰고 기뻐하면 출렁거려 돈이 튀어나올 까봐 가만히 앉아 구경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면서 돈 몇 푼 하나님께 적선 하는 아주 시 건망지고 멍청한 스쿨우지(구두쇠) 성도는 아닙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찬양은 과연 누구를 위해 합니까?
예배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합니까?
기도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합니까?
설교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합니까?
여러분의 찬양이 오직 찬송 받으실 그 하나님께만 드려지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의 임재 앞에 서십니까? 여러분의 예배 안에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한 몸서리치는 절규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그분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하는지 여러분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것으로 뜯어 고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까?
과연 내가 전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그분의 사신으로서의 냉수 한 그릇 같습니까? 아니면 그 설교에 진노하셔서 심판을 명령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까? 그 설교자를 죽여 버리고 싶으셔서요…….

하나님이 빠져버린 신앙과 교회는 흉물입니다. 관광지입니다. 전시관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건물이 임시 가건물일 찌라도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만나는데 어떤 장벽 과 장애도 없다면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향해 돌파해 들어오시고 여러분은 누구의 걸림도, 어떤 제한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해 밀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임시 가건물을 가장 최고의 성소, 하나님께서 직접 짓고 싶어 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곳은 직분도, 신분도, 사회적 벼슬도, 체면도, 남자이든, 여자든, 가장이든, 자녀든, 원로이든, 새 성도든 아무런 제약도, 제한도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예배 받으실 한 분과 그분만을 예배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며,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분의 몸이며 그분의 영광이 머무르고 싶어하시는 다윗의 장막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화려함, 현란한, 웅장함, 기교, 프로그램들을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오. 오직 그분의 교회는 그분과 그분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기는 그분만을 예배하는 자들만 있는 교회입니다. <954/120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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