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래원목사 / 올랜도 선한목자교회 담임 | |
우리가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때 우리에겐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고, 순교까지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상의 교회는 성도라는 이름도, 권위도, 그 이름을 지키고자 하는 순교적인 삶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도라 불렸을 때 그것은 거룩한 이름이었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우리들에 대한 최고의 영애를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도 우리를 거룩한 성도라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는 점점 사라지고, 집사, 권찰, 권사, 장로, 목사 등 직분으로 불려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좋은 이름, 축복의 이름, 소망의 이름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제 교회는 그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들어가야 어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그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뇌가 맘 한켠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 한 자매입니다. 그런데 직분이 그 사람을 증명해 주는 명칭의 등장으로 천국에서도 부르지 않는 그 명칭들을 마치 영원한 이름처럼 지상의 교회는 거침없이 부릅니다. 그 앞에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사람들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이상한 것은 000성도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고, 별로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안수집사도, 그냥 집사도, 권사도, 권찰도 또 무슨 명칭이 있나??? 모두 다 성도입니다. 천국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기타 다른 이름으로 우리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여 부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명칭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것이 아닌 그 명칭 때문에 싸우고, 편이 갈리고, 돈을 들여 사고, 돈을 받고 파는 안타까운 부조리가 교회를 채우고 있습니다. 성도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이렇습니다. 성도(聖徒)는 기독교 신자를 높여 이르는 말로 성(聖): 거룩함, 성인, 하늘의 아들이란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도(徒):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동류, 제자, 문하생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면 성도란 하나님의 아들을 혹은 성인의 제자, 문하생, 그분을 따르는 무리, 동류라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 단계 낮춰 부르는 명칭이 신도(信徒)라는 이름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종교를 믿더라도 종교를 가진 일반적인 용어가 신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독교회를 폄하하고 구별해 버린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를 신도라 부르는 것은 그냥 그저 그런 종교 하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가치를 낮춰 부르는 이름인데 그보다 성도의 이름의 가치를 낮춰버린 단어가 바로 평신도(平信徒)라는 이름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아무런 직책을 가지지 않는 일반 신자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이조 시대에 평민이 누구입니까? 벼슬이 없는 일반인. 특권 계급이 아닌 일반시민을 평민이라고 불렀습니다. 평민의 평과 신도가 함께 합성되어 평신도(平信徒)라는 이름이 탄생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고 옥한흠 목사님을 한국교회의 어른으로 존경하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에 실수한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평신도라는 이름을 한국교회에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치를 한 순간에 한 종교를 따르는 평범한 신도들로 만들어 버린 것 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가 어떻든 이 이름이 불려 지면서 모든 성도들은 평신도로 내 몰렸고 교회 내에서 특권계급을 가진 사람들과 구별돼 버렸습니다. 요즘은 평신도라는 이름이 거의 대부분 한국 교회의 대세입니다. 그 이름이 불려지면서 성도들은 평범한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평신도가 교회에 존재한다면 그 평신도가 섬기는 귀족, 양반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사이지요. 평신도는 엄격히 따져 사역자와 비사역자, 목회자와 비 목회자를 아주 명확히 구별해 버렸습니다. 그럼 교회는 딱 두 가지 명칭만 존재하게 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입니다. 일반화된 용어를 가지고 뭘 그러느냐! 하시겠지만 언어라는 것이 그 단어와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의 사고체계는 그 언어와 말에 스스로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체계는 지속 가능한 어떤 시스템을 주입하면 그것이 굳어진 사고인식이 돼버립니다. 결국 주입된 시스템이 사고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한국 교회는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름 “평신도”라는 새로운 존칭에 대한 인식전환 시스템을 가동하게 되었고 처음엔 어색하던 그 명칭이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성도들을 부르는 명칭이 돼버렸고 성도들마저 그 이름을 쓰는 것에 대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이미 성도들의 사고 안에 인식되어버린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그 사람의 미래와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의 위력이고, 말이 가진 능력입니다. 어느덧 부르기 편하고 쉬운 용어 하나를 골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성도들의 의식 속에 “우리는 평신도라 아무것도 못합니다. 우린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 만한 능력이 있기나 한가요?” 라고 우리는 그 말의 위력을 실제 신앙생활 안에서 경험하고 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균형이 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각 지체와 마디가 서로 연결된 유기적인 형태입니다. 그런데 몸의 구조가 상, 하 관계가 되고 수직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조는 갑, 을의 구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구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와 비리가 단절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목사들이 성도 위에 굴림 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평신도가 목사를 섬기는 반 성경적 구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이 주인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목사들이 먼저 팔을 걷어 부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성도)을 섬겨야 합니다. 먼저 알고, 먼저 배웠고, 먼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도자들이 그분의 뜻을 따라 앞서서 걷고, 앞서서 행하고, 앞서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이 몸에 배어있지 않는 종은 종의 자격이 없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몸에 배어있는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상전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특권계급이 아닙니다. 상전이 아닙니다. 목사들은 단지 그분의 자녀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종일뿐입니다. 그분도 이 땅에 오셔서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셨으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 주었습니다. <937/0723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