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엄처시하(嚴妻侍下)의 남편들

<칼럼리스트 / 탬파거주>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식사를 마치고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자기의 부인에 대하여 농담을 곁들인 좌담이 이어졌다.
모두가 부인이 무섭다고 하며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특히 남편의 위상이 위축되고 부인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고들 이구동성으로 말들을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처시하의 생활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어느 분께서는 우스갯소리를 곁들여 이런 말도 했다 그는 얼마전에 간(肝)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갔었는데 진찰을 마친 의사말씀이 “선생님께서는 간기능 검사를 하실 필요가 없다”고 하더란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간이 없어져버렸다고 말하더란다. 이유는 자기는 매일같이 부인에게 구박받고 야단을 맞으며 살다보니 간이 쪼그라들어서 이제는 아예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B형이나 C형 간염검사를 포기하고 병원 문을 나왔다고 하여 모두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얼마나 마누라한테 혼이 나며 살았으면 간이 없어졌느냐고 하며 그 사람은 요즘 흔히들 말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냥 우스갯소리의 농담이지만 요즘세태의 남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생겨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엄처시하(嚴妻侍下)란 아주 엄하게 남편을 다룰려고 사사건건 잔소리하며 자기만의 생각대로 따르고 살라고 야단을 치는 부인을 모시고사는 주눅 들어 벌벌기는 남편의 인생을 말함이다. 또한 결혼한 남자들 중에서 아내를 무서워하거나 아내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통 공처가(恐妻家)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남편들 스스로는 자신은 아내에게 눌려지내는 공처가가 아니라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처가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은 엄처시하의 힘없고 가여운, 애처가가 아닌 공처가로만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엄처시하의 시하(侍下)라는 말은 모실 시(侍)자에 아래하(下) 자를 써서, 원래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나 그런 처지의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엄처시하라는 말은 아내를 모시고사는 그 아래의 남편이라는 뜻에서 아내에게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 남편을 말한다.
그래서 요즘에 한국에서는 아래와 같은 옛날의 고사 성어를 인용하여 아내에 대한 새로운 유행어가 사회적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이 표현들 중에 하늘天자를 빼고 그 자리에 妻자를넣어 글을 만들었다.
인명재처(人命在妻):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달려있다.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최선을 다한 후에 아내의 명을 기다려라. 지성감처(至誠感妻):정성을 다하면 아내도 감동한다. 처하태평(妻下太平): 아내 밑에 있을 때 모든 것이 평안하다. 순처자흥(順妻者興), 역처자망(逆妻者亡): 아내에게 순종하며 살면 삶이 즐겁지만 거스르면 생활이 고달프다. 이것을 보면 요즘 남편들의 눈물겨운 생존법을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하고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옛날 어느 고을의 원님이 무서운 부인 밑에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사사건건 부인의 말에 의해 고을의 행정도 이어가고 있었다. 기를 못 펴고 살던 원님은 자기만 이렇게 부인에게 쥐어사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여 하루는 수령, 방백들을 불러모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엄처하에 사는 사람은 왼쪽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자리에 남도록 명령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왼쪽으로 갔으나 딱 한사람만 그 자리에 남아 서있다. 원님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아직도 세상에는 이렇게 부인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부러운 나머지 “너야말로 사내 중에 사내며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는 엄부시처(嚴夫侍妻)의 표본이로다”하고 칭찬을 해줬다. 그러자 그 이방관리가 하는 말 “사또, 제 마누라가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해서 저는 마누라 말대로 안 갔을 뿐입니다요” 그러자 원님은 호탕하게 크게 웃으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네, 자네 같은 지독한 공처가는 처음 보았네 하하하” 또 하나의 재미난 이야기, 엄처시하에 시달리는 어느 남편이 부인과 함께 이스라엘의 성지순례에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부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만 여행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과 시름에 잠긴 남편에게 현지의 장의사가 물었다. 부인의 유해를 한국으로 운구하려면 5천 달러가 들고 예루살렘에 매장하려면 5백 달러가 드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아내의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장의사에게 거듭거듭 묻는 말이 뜻밖이었다. “이곳이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곳이 맞지요?” 혹여 엄처의 아내가 다시 부활할까봐 두려워서 그랬을까? 오죽하면 죽어서도 다시 살아날까 봐 걱정을 하며 다시는 상면하기를 꺼려하는 엄처시하의 남편의 심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시사성유모에 마음이 편치가 않다.
세상의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시절의 그 남자다운패기는 점점 사라지고 공처가신세로 전락을 하고, 여자들은 처녀시절의 청순, 가련한 모습은 어디로 가버리고 잔소리 많고 억센 엄처로 바뀌기 마련이다. 처음에 시집을 왔을 때 새색시의 아내는 사뭇 애처롭기 그지없다. 오직 한사람 신랑만 의지하며 낯선 집안에서 시댁식구들을 대하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아이를 하나 둘 낳으면서 서서히 위상이 바뀌어지고 달라진다.
시집을 큰 나무로 비유한다면 신랑은 가지로서 힘없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끝발 없는 존재라고나 할까…… 그런데 시집온 색시가 해가 지나면서 아이를 몇 명 낳고 나더니 가지를 점령하고 줄기로 이동했다가 결국에는 뿌리가 되어 온 집안을 장악하고 뒤흔드는 중심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들 할머니가 그랬고 내 어머니가 그랬으며 지금은 내 아내가 그렇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더라도 천하를 제패하는 것은 여자였다. 흔히들 남자들은 술좌석에서 자기부인을 안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 아내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는 남편들이 바깥 술자리에 나와서 마누라를 조롱하며 옛날 잃어버린 권위와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없는 애인까지 등장시키며 낄낄대고 스스로를 자위한다. 애인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고 마누라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다며….. 엄처시하에 얼마나 핍박과 구속을 받고 살았으면 저럴까?..하고 동정심마저 생겨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게 다 행복한 푸념에 불과하다. 세상남자모두가 그렇게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운 정 고운 정 함께 나누며 오늘날 이렇게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은 모두다 엄처, 악처, 타령으로 구박받아온 집안 살림의 기둥인 마누라 덕택인 것이다. 찍소리도 내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myongyul@gmail.com <933/061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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