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본 마이애미한인사회의 옛 모습 ( 16 )
조국의 민주투사들을 강사로 초빙한 강연회
국내의 군사독재가 지속되면서 미국 거주 동포 중 모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청 장년 동지 몇 분이, 모든 고초를 무릅쓰고 국내 민주화 운동의 험한 길을 걷고 있는 인사들을 초청, 현지 동포를 위한 강연회를 열기로 했음은 미국 내 다른 작은 도시의 한인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신문 보도를 통해 현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동포들의 밀집지역인 엘에이, 뉴욕, 시카고, 워싱턴 디씨 그리고 캐나다의 토론토 등지에서는 심심치 않게 국내의 민주화 운동 선봉장들이 초청돼 강연회를 열고 있었으나 그 밖의 지역은 그런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긴 강사의 여비, 체재비 등 적지 않은 비용을 마련해야 하겠기에 동포 인구 5만 미만의 도시에서는 언뜻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이애미 지역의 당시 동포 수는 그 10분의 1 정도인 5천명 미만이었음에도 의식수준이 올바른 꿋꿋한 동지들이 버티고 있어서 비용 갹출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플로리다 내의 다른 도시에서는 당시 동포의 수가 많지 않아서였든지 그런 기회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제일 먼저 모셔 온 분은 ‘특권을 누리지 않는 보통 사람’을 ‘씨알’로 표현하면서 이승만 독재에서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비폭력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 다섯 차례의 옥고를 치르며 두 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한국의 간디’ 함석헌(1901~1989) 선생이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출판인,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에, 광복 이후에는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이며 문필가였다.
언제나 흰 두루마기를 입고 긴 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전 세계의 공항에 내려 낯 선 타민족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활보했던 애국자 함석헌 선생을 이 고장에 모셨던 일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장시간 강연을 하는 게 안타까워서 사회자가 “의자에 앉아서 하시라”고 권했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늙은이가 서서 버텨야지 날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며 2시간이 넘는 강연을 아무런 피로감도 없이 꼿꼿하게 서서 계속해 젊은이들을 무색케 했었다.
이어 초청된 강사는 문익환 목사의 친동생 되는 반독재투쟁의 선봉, 문동환 목사(1921~, 한신대 학장, 평민당수석부총재 역임), 미국 기독교를 받들던 한경직 목사에 맞서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한국불교로 자리 잡았 듯이 기독교도 이제 한국민족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및 한신대(한국기독교신학대학)를 창립하고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김재준 목사(1901~1987, 당시 한국민주촉진국민연합 고문)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이끌며 유신독재의 인권유린을 낱낱이 고발, 민주화 운동에 큰 힘을 보탰던 함세웅 신부(1942~, 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동아일보편집국장 재직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100 여 명의 후배 기자들과 함께 쫓겨난 ‘한국언론의 사표‘요 ’해직기자의 대부‘ 송건호(1927~2001, 서울 한겨레신문 창립,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 선생, 한국목민선교회장으로 이익보다는 사명을, 영광보다는 진리를 택해서 복음의 사회참여를 강조하고 유신과 그 동조자들을 질타한 탓으로 24회나 옥고 및 연행을 당한 고영근 목사(1933~2009) 등 쟁쟁한 우리 민족의 양심 세력들이었다.
특히 고 목사님은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등 당대 권력자와 맞서 싸우다 투옥돼 재판정에서 거침없이 독재정권을 비판한 사건으로 유명한 분이다. 독재 정권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독재 정권에 협력하는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도 가차 없었기에 명예훼손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었으며 이러한 인권 중시 목회로 인해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인권상 첫번째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이 분은 옥고를 치르는 동안 혹시나 사모께서 석방운동을 할까봐 ’자신을 비굴하게 하는 석방운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며 부인에게 재삼 당부했다고 전한다.
구약의 예언자처럼 고목사님은 엄혹했던 유신 시절이나 유신 이후에도 초지일관 자기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했던 분이니 이 분이야말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암5:24)’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자 불의와 싸웠던 드문 성직자였다.
이 분의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떳떳하지 못했던 정권은 바른 말을 하는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것이 국민들, 특히 신자들을 자극할까봐 은근히 겁이 나서 되도록이면 체포 후에도 훈방 조치하려고 애를 썼다.
역시 수사관은 고목사님께도 소속 교단인 예장총회장 앞으로 석방 탄원서 형식의 각서만 써 주면 즉시 석방하겠다고 계속 종용했다. 이에 고목사님은 “이 나쁜놈들, 쿠데타에 이은 독재로 죄 지은 네 놈들이 써야 할 각서를 날더러 쓰라니! 이 악마 같은 놈들! ”하며 정권의 압력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고목사님은 당시 각서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1, 앞으로 정치문제를 거론 않고 복음만 전한다는 각서 내용은 지금까지 복음은 전 하지
않고 정치문제만 거론했다고 자인하는 꼴이니 그럴 수 없다.
2, 무릎은 한 번 꿇으나 두 번 꿇으나 마찬가지니 무릎을 꿇을 수 없다.
3, 3백여 명의 학생들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목사 가 혼자 나 가는 것은 목자가 양떼를 이리 가운데 버리고 도망하는 짓이다.
4, 내가 쓴 각서를 악용해서 ‘내가 개전의 정이 있어 풀어 주었다’고 신문에 보도할 텐데
나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을 그렇게 실망시킬 수는 없다.
5, 공산당원들도 25년간이나 독방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각서 한 장을 안 쓰는데
목사가 4년도 못 되어 각서 쓰고 무릎 꿇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고영근 저, ‘옥중에서 희망을 노래하다’에서)
여기서 얼른 생각나는 분이 우리 한국인 교역자 중에도 꼭 한 분, 기독교의 노벨상(상금 100만불)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은 너무도 유명한 한경직 (1902~2000, 서울 영락교회목사, 예장총회장 역임) 목사로 수상 이유는 ‘사회복지와 복음 전파, 남북 화해’ 등에 기여한 공로(1992)였다.
그런데 한목사님은 광복 직후 공산당 압제가 두려워서 신의주 교회 신자들을 모두 ‘공산 이리 떼’에 맡기고 월남한데 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이번에도 서울 영락교회 신자들을 공산당에 맡기고 또 다시 부산으로 피란하는 등 한목사님의 두 차례에 걸쳐 양떼들을 팽개친 행동은, 3백여 명의 양떼들을 이리 가운데 버리고 도망 갈 수 없어서 장기간의 감옥 생활을 감수한 진정한 목자 고영근 목사님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목사님은 일제 때는 친일했고 광복 후에는 이승만 등 역대 독재 정권에도 아부의 극치를 이루어 청와대의 구국기도회 등을 주도하는 비굴한 자세로 의식이 올바른 국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뜻있는 기독교인들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했다.
한목사님이 평범한 교역자였다면 필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전 세계 목회자들의 꿈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게 받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교역자라는 데서 그 분의 비교역자적 자세가 ‘하얀 옥에 검은 티’처럼 눈에 확 띄는 것이다.
이 고장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위 분들은, 올바른 민족양심을 가진 우리들이라면 모두가 우리의 선진(先進)으로 받들어 존경해야 할 분들이다. 그 밖에 조국의 민주화 투쟁에 몸 바친 많은 분들과 함께 이 분들이야 말로,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오늘 날 우리가 그나마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도 향유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고마운 분들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악랄했던 독재정권은 국민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이러한 거물급 민족양심 세력들에게만은 오늘날처럼 무조건 ‘종북’이나 ‘좌빨’로 낙인찍지를 못했으니 정권 유지를 위한 지능지수가 한 수 위였던 게 아닌가 한다. (계속) 김현철(플로리다자연치유연구원장) kajhck@naver.com <875/201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