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동칼럼> 임파서블 미션”
최근 어느 날이다. 무심코 틀어본 방송에 화면을 거의 채운 글씨가 바로 한국어로 된 “임파서블 미션”이었다. 어떤 예능프로인 것 같았다.
물론 영어로 된 자막도 없다.
시사프로 외에는 잘 안보는 터라 금세 끄고 말았지만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한국의 안방극장 세대들에게 느닷없이 튀어나와 한참 동안 폼을 잡고 있는 그 한글로 된 외래어의 의미를 알 턱이 있었을까 하는데서다.
물론 손바닥에 적어두었다가 화면이 살아질 때 쯤 극중에 흐르는 내용을 보고 뜻을 알아차릴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표현했어야만 했을까?
한국말로 표현해도 어려운 내용의 의미가 아닌데, PD나 작가가 괜히 고상한 척 해보는 서투른 해프닝쯤으로 치부해보고 말면 될 일이긴 하다.
어느 날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다. 필자를 포함한 몇몇 해외언론인들을 6.3빌딩의 어느 한식점으로 초대한 MBC사장의 저녁 회식이 있었던 날이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에 필자는 사장과 따로 만나 얘기를 좀 나누었다.
“방송에 안 써도 될 웬 놈의 외래어를 그렇게 많이 씁니까. 얼마 전 취재 차 캐나다를 방문한 PD를 포함한 방송제작자들과 나이아가라에서 한잔 사주면서 부탁했습니다.
“엉터리 영어 좀 자중하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에 “그 사람들 말 안 듣지요? 그 사람들 말 안 듣습니다”라며 맞장구를 치더니 자기생각에도 문제라고 했다.
꼭 글로벌 시대 운운하지 않더라도 영어로 꼭 표현해야 할 경우도 왜 없겠는가. 외래어 홍수 운운하며 간단히 매도할 일은 아니다. 대본에 있는 말인지 몰라도 “오마이 갓”을 입버릇처럼 하는 김수미가 밉지는 않다.
그 정도의 영어라면 들어도 거부반응이 없다. 모두 다 아는 말이니깐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적잖은 시청자들 중 난해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을 위의 제목 같은 건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해도 충분할 일이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좋다 꼭 외래어를 쓸 경우 영어권 현지 발음에 맞아야 하며 영어자막도 붙여야 한다.
오래전 모처럼만에 한국을 나갔을 때다.
도착 다음날 조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던 길이다. 안동 시가지를 조금 벗어 난 지점에 있는 어느 상점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소주나 오징어 등 산소 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서 “안동슈퍼”라는 간판이 적힌 편의점을 들어서며 놀랐다.
“슈퍼”라는 큼직한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은 규모의 상점이었다.
몇 권의 노트에 사이다와 미원봉지 몇 개가 덜렁 달려 있는 그 슈퍼(?)를 지키고 있는 주인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슈퍼”의 의미를 아느냐고 했을 때 돌아온 답변이 괘짜다.
“내가 어째 안니껴”라며 치아가 없는 잇몸만 들어내며 웃는다.
그리고 성묘를 마치고 상경한 나에게 17년 만에 처음인 서울의 모습은 너무도 변했다.
새벽거리에서 만난 어느 환경미화원이 입고 있는 윗도리도 U.C.L.A로 되어있다.
인사동에서 만난 호떡 굽는 아주머니가 걸친 잠바 등어리에도 뉴욕경찰을 상징하는 N.Y.P.D다.
그래서 해질 무렵의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맞을 것 호적초본만 영어로 찍혀 나오면 모두 영락없는 미국놈들이네 라며 말이다.
몇 일전 그 날 화면에 떴던 어색하게 느껴지던 그 한글로 나온 영어와 김수미의 “오마이 갓”이 오늘 아침 어느 인터넷 창에서 본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자라는 내용의 글 속으로 오버랩 되어 온다.
그 아름다운 한글문자를 두고 왜 “임파서블 미션”이라고 썼을까하는 아쉬움에서 해 보는 말이다.
추석날이다.
고향 길을 재촉하며 고속도로를 매운 귀성차량들의 대열에 부러운 시선을 보내며 올해도 못 찾아가 보는 고향 성묘길이지만 그 날 성묘길에서 만났던 안동슈퍼 간판이 팔월 보름 휘영청 둥근달을 짓궂게 가리고 있는 먹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듯해 또 한번 짠해지는 향수를 달래며 이 땅에서 설흔 여덟 번째 맞는 추석날 저녁에 띄어보는 글이다. <799/2011-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