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윌리암 왕자와 우리의 마지막 황손(皇孫) 

영국의 윌리암 왕자와 우리의 마지막 황손(皇孫) 

Canada day(7월 1일)를 맞아 영국의 윌리암 왕자 부부가 캐나다를 방문했으며 지난 11일 2박3일의 LA 체류 일정을 끝으로 귀국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지난 4월, 21세기 최고의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 이들 로열 커플은 약간의 저항이 있었던 캐나다의 유일한 불어(佛語)권인 퀘백주를 제외한 모든 방문 도시마다 열광적인 환영인파속에 북미주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이들의 캐나다 방문일정의 발표에 맞춰 왜 하필 워싱턴 포스트지는 한국의 마지막 황손(皇孫) 이 석씨의 의 근황을 자세히 보도했을까?
우연의 일치라기 보기에는 그 절묘한 타이밍이 그렇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황손이 딴따라가 될 수 있느냐는 핀잔에 못 이겨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수영장 청소부 경비원 등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귀국, 서울 아닌 전주에서 한국정부가 아닌 이 씨 종친회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가는가하면 자살을 아홉 번이나 시도한 적이 있다며 마지막 황손(皇孫)의 근황을 포스트지의 마이클 엘리슨 챈들러 기자가 전주를 직접 방문하여 취재한 기사를 지난 18일자로 보도했다.
기자는 이어 이 석의 희망사항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도 상징적인 군주제가 복원되어 궁궐에서 관광객들과 만나며 살고 싶다”는 황손의 마지막 소원 말이다.
그리고 윌리암 부부 방문 일정이 끝날 무렵 한국 언론들은 프랑스에 강탈당한 외규장각 도서의 임대형식의 반환이지만 그 중 한 의궤를 공개한다며 떠들썩했다.
감히 이 석을 윌리암 왕자에 견줄 일도, 외규장각 도서의 가치를 이 석의 초라한 마지막 삶과 애써 비교해 보며 생각해 보려는 뜻은 더욱 아니다. 혼자서 “이게 아닌데”를 외치다가 글로 한번 옮겨봤을 뿐이다. 그리고 필자와 이 석과의 자그마한 인연도 한번 여기에 옮겨 보려고 한다.
8년 전 어느 날이다. 서울의 “한라산”이라는 연회장에서 있었던 필자가 발로 뛰면서 취재하여 모은 하와이 중국 멕시코의 이민100년 역사를 간추린 필자의 저서 “이민 100년 그리움 100년”의 출판기념회가 있던 날 황손 이 석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할아버지(高宗) 시절 이민선에 몸을 싣고 조국의 품을 떠나 망망대해를 건넜던 그들의 삶을 필자가 어떻게 기록하고 조명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수소문 끝에 출판기념회 장소를 알아내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 필자의 친필서명을 받고는 귀중한 책자라며 증정본을 꼭 껴안고는 축하객들의 박수 속에 자리를 뜨던 황손 이 석.
1941년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열 한 번 째 아들로 태어나 상궁들에 둘러싸여 “아기씨 마마”로 불리며 자랐던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마지막 황손, 그 책의 저자인 필자의 손을 꼭 잡은 채 건승을 기원하며 전주행 고속터미널을 찾아 나서는 황손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로열 커플 윌리암 왕자 일행의 화려한 북미주 나들이 기사 속에 오버랩 되어 온다.
결혼축가로 그리고 국민애창곡으로 불리었던 그의 노래 “비들기처럼 다정한 사람들”도 없고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도 아닌 그의 히트송과는 너무나 다른 쓸쓸한 황혼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지막 황손의 모습! 이 대로가 좋은가 한번쯤 짚어 볼 과제가 아닌가 싶다. <792/201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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