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1>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11>

영랑 시는 우리나라 최고의 시”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1966년 어느 날, 영랑이 사랑했던 후배 중 한 분인 시인 박목월(1916~1978, 본명은 영종)이 문학 강좌 녹화를 위해 서울 문화방송을 방문했다. 이때 목월은 오랜만에 영랑의 셋째 아들(당시 MBC 기자)을 만나 영랑 시에 관한 의견을 밝혔다.
당시만 해도 영랑의 시가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래도 목월은 영랑의 시집이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을 의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목월은 이런 말들을 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영랑시집이 아직 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끌지 못한다는 것이네. 영랑 시는 우리 문인들 사이에서는 소월 시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데, 서점에서는 아직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네. 내 생각으로는 좀 더 시간이 흘러 독자들이 영랑시의 진가를 알게 되면 소월 시 못지않게 영랑 시를 가까이하리라 확신하네.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지.”
그는 이어서 “영랑 시가 다른 시인들의 시에 비해 국민들에게 너무 늦게 알려진 이유는 첫째, 영랑 선생이 세상을 뜨기 2년 전까지 서울에서 살지 않고 시골 고향에 묻혀 산 데다 그분의 고귀한 결벽성 때문에 다른 문인들에 비해 중앙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네.
둘째는 소월 시처럼 초등학교 학생조차 읽는 대로 풀이가 되는 시가 아니라 영랑 선생의 시는 너무 깊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네.
셋째는 시어에 고향의 방언을 전례 없이 많이 사용해서 타 지역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못 준 점 등을 들 수 있네.”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물론 방언 때문에 더 높이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문인들, 국문학자 그리고 호남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호남 이외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꼭 그렇지 만은 않다는 지식층의 의견도 있었다.
그 후 40여 년이 흐른 오늘, 중학생 이상의 국민치고 영랑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영랑의 인지도는 상승했다. 목월의 예언을 다시금 회상하게 하는 결과인 것이다.
당대 문학평론가, 소천 이헌구(전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는 자주 영랑의 시에 관해 단문을 썼는데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영랑이 있다.”면서 “그러나 언어의 멋과 리듬의 격조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의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고 했다.
또 영랑 시에 관한 정지용의 여러 평론 중 눈에 띄는 대목으로 시 ‘청명’에 관한 글이 있다. 먼저 시 ‘청명(靑明)’의 일부를 보자.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릿속 가슴속을 젖어 들어
발 끝 손 끝으로 새어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 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고웁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라
밤새워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청명’ 중에서)

다음은 정지용의 평론의 일부분이다.
“……영랑 시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평필(評筆)을 던지고 독자로서 싯적 법열(法悅)에 영육(靈肉)의 진경(震慶)을 견디는 외에 아무 발음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을 사랑하느니 자연에 몰입하느니 하는 범신론자적(汎神論者的) 공소(空疎)한 어구가 있기도 하나 영랑의 자연과 자연의 영랑에 있어서는 완전 일치한 협주(協奏)를 들을 뿐이니 영랑은 모토(母土)의 자비하온 자연에서 새로 탄생한 갓 낳은 새 어른으로서 최초의 시를 발음한 것이다.”
당시 우리 문단에서 가장 훌륭한 서정시인 중 한 분으로 추앙받던 지용(池龍) 정지용(鄭芝溶)은 영랑의 시를 논평할 때마다 이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랑 묘 이장식 때 좌측에서 우로 김광섭, 언론인 최상덕, 극작가 박진, 이하윤, 모윤숙(1954년 11월)

▲영랑 묘 이장식 때 좌측에서 우로 김광섭, 언론인 최상덕, 극작가 박진, 이하윤, 모윤숙(1954년 11월)

가장 사랑했던 후배 서정주 시인이 본 영랑

영랑이 첫 시집인 《영랑시집》(1935)의 편집을 당시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용아 박용철(1907~1938, 시문학 발행인 겸 편집인)에게 맡겼고 두 번째 시집 《영랑시선》(1949)은 후배 시인 중 가장 사랑했던 미당 서정주(1915~2000)에게 맡겼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첫 시집의 편집을 시인 용아에게 맡긴 이유는 용아 시인이 영랑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데다 당시 영랑이 고향 강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시집을 낼 때는 영랑이 서울로 이주한 뒤였는데도 직장 일로 너무 바빠서 역시 가장 가까이 지내던 후배 미당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영랑의 셋째가 선친과 사별 후, 선친에 관한 이야기를 서정주(시인), 박목월(시인), 이헌구(평론가), 이하윤(시인), 황금찬(시인) 등 여러분을 통해 들어 왔지만 그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 분은 서정주 시인이었다.
셋째가 서울 동작구 사당동 ‘예술인촌’에 입주할 무렵인 1970년대 초, 마포구 공덕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시인 미당 역시 셋째 집에서 200미터도 채 안 되는 같은 ‘예술인촌’으로 이사하여 자연스레 셋째는 미당 댁을 자주 찾았다.
미당은 어느 날 셋째에게 선친 얘기를 꺼내면서, 1930년에 <시문학> 지에 발표된 시를 통해 상상했던 영랑은 아주 섬세하고 여성적인 분이였는데, 1936년에 종로구 적선동의 박용철 시인 댁에서 처음 만난 영랑은 완전히 딴판이어서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집 주인인 용아 시인의 소개로 12년이나 아래인 미당과 첫 인사를 나눌 때에도 수줍어서 얼굴이 불그레해져 꼭 촌색시 같은 순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 후 서울의 음악회 때마다 상경하는 영랑을 자주 만나면서 서로가 친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어느 날 둘이서 술 한 잔씩을 나누고 충무로 1가 입구(현 서울중앙우체국) 모퉁이를 함께 걸어가는데, 영랑이 지나가는 말처럼 “오장환(시인)이 보고 지금도 우리나라 시왕(시인 중의 왕)이라 한단가?” 하고 물어,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했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면서 “왕관은 네가 써라. 내가 줄 테니……”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미당은 속으로 은근히 놀랐더란다.
이어 미당은 “그 말은 평소에 영랑 선생이, 그 당시 인기가 높았던 오장환이 시왕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불만이 있음을 살짝 비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영랑 선생은 그 말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은근히 과시했던 것이네.” 하며 미소를 지었다.
미당은 또 영랑이 문우들과 금강산에 다녀오면서 서울에 들렸는데 미당을 만나자 “금강산에 다녀왔는가?” 물어서 “아니오.” 했더니 “내가 쓰고 남은 돈인데 이것이면 왕복 여비로 충분할 것이네, 다른 생각 말고 꼭 한 번 다녀오게.” 하면서 그때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한다. 미당은 “그 덕분에 금강산 구경을 잘 했네.” 하고 지난날의 비화를 털어 놓기도 했다.
영랑과 미당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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