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6>

▲동아일보에서 3월말 발간한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의 표지. <가격 9,000원>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6>
20년 된 소작인에게 농토 무료 증여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1943년 봄 어느 날, 사랑채 마루에서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백발 노인이 왼손에 흰 서류를 들고 젊은 영랑 시인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본 영랑의 어린 아들(당시 초등학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이 왜 젊은 아버지에게 큰절을 할까 하고 놀랐던 것이다.
궁금해 못 견딘 이 소년은 저녁 때 안채로 들어가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리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여쭈어 봤다. 어린 아들이 놀랄 만하겠구나 싶었던지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20년간 우리 논 네 마지기(약 800평)를 소작해 온 노인이시란다. 그렇게 긴 세월 소작을 해 오셨으니까 아버지가 그 땅을 전부 그분 앞으로 명의 변경해서 땅문서를 드렸단다. 그랬더니 너무 고마워서 그 노인께서 그렇게 큰절을 하신 거란다.”
이런 일이 그 후로도 몇 번 더 있었다.
영랑의 이러한 자세는 일찍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랑의 할아버지 되는 김 석자 기자(金奭基, 1851~1922) 조부는 1906년(병오년), 당시 흉년이 들자 강진군 작천면 주민들에게 식량을 풀었다. 이후 주민들은 삼당리에 보정안민비(輔政安民碑)를 세웠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그 비석의 행방을 알 길이 없고 집안 족보의 기록에만 남아있다.
또 영랑의 아버지 김 종자 호자(金鐘湖, 1879~1945) 부친 역시 1911년(신해년)에 가뭄으로 흉년을 맞은 칠량면 주민들에게 식량을 풀어, 주민들은 동백리에 영세기념비(永世紀念碑)를 세웠다. 100년 가까이 되는 지금, 비석 가운데가 토막 난 것을 수리해서 칠량면사무소 앞뜰에 보존하고 있다.

자식에게는 호랑이 같았던 아빠

▲셋째를 안고 있는 영랑

▲셋째를 안고 있는 영랑

1944년 봄, 영랑의 셋째(1935~)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의 일이다. 생후 단 한 번도 화투짝을 구경한 적이 없는 데다 화투라는 단어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차에 귀가 길에 친구 집에 잠깐 들렸다가 친구의 책상 위에서 화투짝을 보았다.
처음 보는 그림이라 친구에게 “뭔데 이렇게 예쁘지?” 하고 물었다. 친구는 “응, 화투의 공산이라는 거야. 갖고 싶으면 가지고 가.”라고 했다. 셋째는 좋아 하며 화투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눈에 띄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영랑 자신이 평생 화투짝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어린 아들놈 책상 위에 화투짝이 있다니!
화가 난 영랑은 이게 어디서 났느냐고 어린 아들을 다그쳤다. 아버지가 왜 화를 내는지 그 이유를 알 길 없는 아들은 사실 대로 말씀 드렸다.
영랑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두 번 다시 이런 것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어린 아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면서 화투짝을 활활 타는 아궁이 불 속에 집어 던졌다.
그 후 자식들은 하나 같이 환갑, 고희가 지나도록 화투짝 순서조차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째는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아버지에게 안겨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안긴 적이 있었나?” 그 후 셋째는 유독 그 사진을 보물 다루듯 애지중지했다. 이렇게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안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집안 어디에서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풍속은 유교 전통의 영향으로 어른들 보는 앞에서 손을 잡는다든가 안아주는 등 처자식에게 애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부친의 비석에 ‘조선인’, 상석에 ‘태극문양’ 새기고

 1943년 초, 중풍으로 병석에 누은 영랑의 부친(김종호)은 자신의 장례에 대비해 영면관을 만들어 놓고 이어 비석과 상석을 준비시켰다. 

이때 비석의 비문에 ‘조선인’임을 밝히면 어떻겠느냐는 아들 영랑의 제의에 부친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영랑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석공을 집에 기거시키며 곡식 창고에서 극비리에 비석을 완성했다. 비석에는 ‘조선인 김종호의 묘(朝鮮人金鐘湖之墓)’라고 새겨졌다. 이어서 상석에는 선명한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영랑은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창고 구석에 둔 비석과 상석 위에 곡식 가마니를 얹어 겉에서는 안 보이도록 보안에 만전을 기했다. 만에 하나 일본 경찰이 알면 부자 및 석공이 붙들려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1년이 지나 중증 치매까지 겹친 부친이 1945년 9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영랑의 부친은 자신이 죽기 전에 조국이 해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랑은 미리 마련해 둔 비석과 상석을 곳간에서 꺼내 장지로 옮기면서 자식들에게”가장 마음 아픈 것은 할아버지가 노망(중증 치매)이 드셔서 우리 조국이 해방된 기쁨을 모르고 돌아가신 것이다. 또 이렇게 해방될 줄 알았으면 비문에 ‘조선인’을 넣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비문을 고치기도 그렇구나.”라고 했다.

감격의 조국 해방! 강진군 내에 태극기 퍼트리고
국악기 동원해서 애국가 연주를 주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날로 일본군에게 불리해지면서 영랑은 방송(당시는 경성방송국, 호출부호 JODK, 현재 서울중앙방송 HLKA)을 들으려고 뉴스 시간이면 라디오에 매달렸다.
당시는 라디오 성능이 워낙 나쁜데다 강진 지역이 난청지역이었기에 찍찍거리는 지나친 잡음 때문에 아나운서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영랑은 그때마다 귀를 라디오에 바짝 대고 잡음 속에서 뉴스를 추려 듣느라 애를 썼다.
일본이 패망하면 만 35년 만에 한국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어 독립국가로 다시 일어서는 오랜 꿈이 실현될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영랑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선언문을 낭독하는 뉴스가 보도됐다.
아! 우리 삼천만(당시 남북한 인구) 민족이 꿈속에서마저 기다리던 조국 해방의 날이 오다니! 이게 생시인가 꿈인가? 뉴스를 듣고 영랑은 감격의 눈물을 흘림과 동시에 자식들이 옆에 있는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큰소리로 만세를 불렀는데 그때 시뻘겋게 상기된 아버지 영랑의 얼굴이 65년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고서 영랑은 갑자기 사랑채 골방으로 들어가 문갑 깊숙이 숨겨 놓았던 태극기를 꺼내더니 자식들에게 보이며 “이것이 우리나라 국기다. 우리 강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이 태극기를 보고 백지에 크레파스로 몇십 장이건 되는 대로 그려라” 하며 재촉했다. 이렇게 그린 태극기들이 강진 군민들의 손에 쥐어졌다.
이튿날, 국악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들이 영랑 생가 사랑채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20여 명의 악사들은 영랑이 사랑채 벽장에서 꺼내주는 북, 장구, 꽹과리, 징, 거문고, 가야금, 아쟁, 해금, 양금, 피리, 퉁소 등 자신이 다룰 줄 아는 악기들을 각자 하나씩 받아 자리에 앉았다. 여름철이라 창문들을 천정 바로 아래 높이 매달아 사랑채 전부가 완전 개방된 넓은 방을 악사들이 빈틈없이 꽉 메웠다.
조금 있더니 풍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현재의 애국가(1948년 이후부터 애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곡이 아니라 해방 직후 1947년까지 애국가로 연주됐던 곡으로, 우리에게는 연말이면 연주하는 영국 민요 ‘이별의 노래(올랭사인)’으로 더 잘 알려진 애국가 곡이었다.
그때 영랑의 어린 자식들은 이분들이 사랑채에서 고작 1년에 한두 번 정도 연주한 것이 전부일 텐데 사전 연습도 없이 즉석에서 끝까지 애국가를 연주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악사들이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조국의 광복을 한껏 기뻐하면서 신들린 사람들처럼 연주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다음호에 계속>201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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