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언론의 기본자세
우리가 미국에서 신문을 하면서 퓨리처를 떠올리는 것은 그가 신문으로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외국어인 독일어를 하는 항가리계 이민 1세로 언어장벽을 넘어 신문을 성공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센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페치에서 뉴욕 월드로 신문왕이 되기까지 그가 남긴 말 중 “사회적 부정을 보고 외면한다면 이는 언론이 아니다. 만약 이를 보고도 기록을 안 한다면 이는 신문이라기 보다 단순한 잡기장(雜記帳)에 불과하지 언론이라 칭할 수가 없다. 신문은 거울 같은 것으로 추(醜)하다고 비켜 갈 수가 없고 내게 불리하다고 가릴 수가 없다.”고 했다. 또 하스트는 “세상 은 항상 밝고 달콤한 것만이 아니다 어두움이 있으며 고통과 죽음이 있다 언론은 세상을 그릴 때 밝고 어두운 면을 함께 보여주어야 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동포사회에서 밝고 좋은 면만 찾아 미래의 희망적 삶을 추구(追求)하자고 한다, 이것은 심히 잘못된 사고(思考)이다. 어두운 면이 썩고 곪아 전체를 오염(汚染)시킨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언론은 사실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들이 내포(內包)하는 진실을 보여주어야 되고, 독자의 알 권리를 지켜주며 그 사회가 잘못되고 있으면 이를 찾아내고 수정(修正)해야 하는 것이 언론인의 기본 사명(使命)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事實)과 현실(現實)을 독자들에게 알릴 의무(義務)가 있고, 그 사회의 희망을 안겨줄 책무(責務)가 있다.
독자의 알 권리에서 그들은 언론에게 “어떤 뉴스를 제공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따라서 언론은 독자의 발언권(發言權)보호를 이행(履行)할 의무도 있으며, 목소리 없는 대중의 팔이 되어 힘센 자의 추(醜)한 힘의 행사로부터 독자를 보호할 의무가 언론에게 있는 것이다.
언론학에서 “사회적 부정을 언론이 외면하고 묵언(默言)한다면 이는 묵언의 동의(同意)에 속해 부정과 동격(同格)”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신문의 역할이 이렇듯 중요하지만 이곳 동포사회는 신문다운 신문이 없다며 신문의 부재(不在)를 개탄(慨嘆)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문다운 신문이 없으면 공동체도 발전할 수가 없다. 또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민초들은 힘있는 자의 억압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역 공동체의 양심은 그 지역 신문을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에서 공중의지(public will)을 개인적 행위보다는 협동적 행위로 우선(優先)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론에서 “표현의 자유는 개인이 그 자신의 사고에 그리고 그 자신의 양심에 의무감을 갖는다,” 는 원칙에 근거하고 표현의 자유란 “개인적 목적을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언론은 지키고 편집자가 그 공동체 여론에 부합되거나 반대되는 부분이 외면된 논조를 피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로 생각해야한다, 더더욱 광고주나 스폰서를 의식해서 옳은 글을 피하는 것은 신문인이 아니라고 월터 리프만은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 진실 보도를 외면한 언론은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스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편집인 지각(知覺)의 한계(限界)를 들 수가 있고, 사실이 왜곡된 편집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의 표현으로 지역 공동체에 우화를 남기게 된다,” 예를 들어 기자가 현장취재를 하지 않고 전화나 이메일로 보내온 취재원의 내용을 그대로 보도함으로서 현장을 지켜보던 독자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 방식은 바로 기자가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이며 독자들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것인 것이다.
오늘 이렇듯 장황한 언론의 기본을 논한 것은 언론부재의 소리가 지역사회에서 높아지고 있어 언론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뒤돌아보자는 취지로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한 언론의 참모습으로 돌아가자고 권하고 싶다.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