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로날드 레이건

<발행인칼럼> 로날드 레이건

레이건 전 대통령이 지난 5일 93세로 타계했다.
세계 제2차대전을 승리로 끝낸 루즈벨트 대통령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레이건 대통령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의 미국시민은 이미 예상했던 것으로 조용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주류사회 메이져 TV는 고인의 치적과 역사적 발자취를 조명하는 등 긍정적인 재평가 작업을 서둘러 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70세가 넘어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처럼 하루가 다르게 조기 은퇴니 명퇴니 하는 시대에 매우 걸맞지 않게 출세한 인물이었으며 배우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그의 대통령 당선에 매우 많은 국민들이 우려를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은 국민의 걱정과는 달리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존경을 한몸에 받는 대통령으로 변신하였다. 하버드나 예일대학 출신 엘리트가 아니어도 대통령직을 잘 할 수 있다는 꿈을 보통사람에게 보여준 극적인 영화 장면 이였던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미국은 국제적으로 이란에서 벌어진 인질극과 인플레이숀으로 매우 힘든 경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을 성공적으로 이끈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항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끈임없이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심어 준 것이다.
또한 그는 매우 자상한 대통령으로 백악관 직원 누구에게나 친근했으며 개인적으로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퇴임 후일 알려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과거 민주당의 죤슨 대통령이 확대한 웰페어에 대한 개혁의 일환으로 극빈자 생계보조를 대폭 감소하고 일하지 않는 극빈자에게는 웰페어 지급을 삭감하는 정책으로 그 당시 많은 비난을 받었지만 후일 그의 정책은 극빈자 감소를 유도한 올바른 정책으로 평가 받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밥그릇을 가져가는 나쁜 대통령으로 일부 비쳐졌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몹시 가슴 아퍼 했으며 자신이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쇠약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가난의 공포가 그들에게 전수되지 않기를 진정으로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건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을 유도하고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 시킨 공로일 것이다. 베르린 장벽이 무너진 독일의 통일과 악마의 제국으로 부른 구 러시아의 몰락으로 세계는 핵전쟁의 위협에서 해방되었으며 동구라파 지역 국민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이들 공산국가들은 체제변경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파탄으로 얻은 자유만큼 고통과 혼란을 겪어야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이 국민을 억압하고 공포정치를 통해 고통만 안겨주는 악마의 국가로 생각하였다.
북한도 그런 국가들 중의 하나로 지적하여 북한내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우리의 기대만큼 가시화된 결과를 얻는 정책은 펼치지 못하고 방관만 했다.
또한 레이건 대통령은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불법행위로 간주하고 1만여명의 노조원을 전원 퇴출시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 노조의 약화는 물론 만성적인 파업 위협과 시민의 불편을 일거에 정리했다.
그 당시 강력한 노조로 알려진 관제사 파업을 단호하게 처리함으로서 민주당 집권하에 급성장한 강성 노조들을 무력화 시켜 향후 20년여 경제부흥을 이룩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진면목은 역시 화술과 웃음일 것이다. 암살을 모면한 후에까지. 특히 그의 유머는 정적들 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마술을 가졌으며 어떤 모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따뜻한 지도자로서의 설득력을 지켰다.
금슬이 좋았던 부인 낸시여사가 이미 10여년전 알츠하이머와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레이건의 질병에 대하여 “이병의 최악은 추억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눌 추억이 많은데…” 라고 하여 노 대통령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했는가를 암시했다.
이제 우리는 이시대의 영웅으로 칭송 받던 대통령을 떠나 보내면서 작별을 나눌 수 밖에 없다.
Good bye Ronnie. <452호/200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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