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장례식

<김현철칼럼>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장례식

내가 이번 생애를 사는 동안 참석한 장례식의 수는 수십 회가 넘을 것이다. 원래 장례식이란 망자가 숨을 거둔지 최소 3일 또는 그 이상의 시일이 지난 뒤에 치러진다. 그런데 조문을 가서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망자 앞에 설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망자의 시신은 몸 안에서부터 부패한지 며칠이 지났다는 생각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그렇듯 주검을 보는 순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 등으로, 아무리 평소 가까웠던 사람의 시신이라 해도 가까이 다가서기가 아주 역겨워지더라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또 누워있는 이 망자는, 내가 침통한 마음으로 앞에 와있는걸 알기나 할까? 조문객이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뒤따랐다.
그 때마다 다짐했던 것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조문객)에게도 이토록 불편한 느낌을 주지 말자는 것, 그보다는 아직 내가 건강할 때 내 장례식만은 사 후가 아니라 내 주관으로 미리 치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따스한 내 손으로 이번 생애에 인연 맺은 상대방의 손을 직접 잡아 보고, 조촐한 식사를 함께 나누며 얘기를 주고 받고, 정감 넘치는 작별 인사도 하는 것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마당에 보다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하곤 했다.
물론 내가 언제 떠나는 지를 미리 알아야 바로 떠나기 직전에 이번 생애에 인연을 맺었던 분들과 마지막 식사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기나, 결국 그 날을 알 길이 없기에 우리가 늘 해 오듯 자신의 7순, 8순, 9순 생일잔치를 할 때 제1부는 생일 축하파티, 2부는 마지막 이번 생애에서의 송별파티(장례식)를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어느 날 육신을 완전히 떠날 때는, 이미 마지막 파티(장례식)를 치렀으니, 유가족들은 밖에 알릴 필요 없이 조용히 시신을 화장 후 적당한 곳에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하긴 원래 장례식이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가족을 비롯해서 망자와 평소 친분이 있던 분들을 위한 것이니 자식들이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남이 하는 대로 또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고집한들 망자가 되어 있는 나로서 별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어쨌건, 우리 인간 사회의 경우, 다 들 그리 해 오듯이, 유가족이 망자의 사망소식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 비싼 비용을 들여 장례식을 치르며 조위금을 받아 챙기고 조화도 받고 3일에서 5일 등 번거로운 장례 의식 절차를 거치는 격식이 내 평소의 성미에도 전혀 맞지를 않았다.
20세기 중엽 이후,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저서 ;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송산), 짐 터커Jim B. Tucker(저서 ; Life Before Life=삶 이전의 삶),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저서 ; 다시 산다는 것, 행간) 등의 반세기를 훌쩍 넘는 영적 세계의 연구 실적과 수많은 정신의학 박사들의 임상실험 저서를 보면, 인간의 죽음이란, 우리가 평소 영혼(신, 구 기독교) 또는 영가(불교)라고 하는, 인간의 의식인 나 자신이 진화를 위해서 혹독한 훈련장인 이 세상에서 미리 결정된 훈련기간 동안 머물다 자신이 이번 생애에서 해야 할 역할(교육)을 마치고 처음에 왔던 본향으로 떠나는 것은, 마치 이번 ‘지구학교’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식을 치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체 즉, 몸(가짜 나)이란, 시간과 공간의 속박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지구학교’ 생활을 위해 우리의 각자 의식(진짜 나)이 이동할 수 있도록 이번 생애의 새 부모님을 통해서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애당초 절대자(신,하느님,하나님,알라 등..)로부터 부여 받은 이번 생애에서의 나의 역할이 끝나면, 이제 더 이동수단이 필요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리의 본 고향으로 떠나기에, 그간 자가용으로 활용했던 육체를 벗어 던지고 다시 전번 생애가 끝났을 때처럼 이제 더는 고통 없는 극히 아름답고 평화스런 저 세상으로 옮겨가,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한없는 평화와 행복을 다시 누린다는 사실까지 과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특히, 최근 이 분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몸을 떠나서 평균 15~6개월 후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새 이름을 갖고 새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과 인연 따라 살다가 때가 되면 다시 떠나는 등 계속 끝도 없이 순환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민족이 받들던 4대 조상까지의 제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다만, 우리 모두 그동안 수천 만 번 이 세상을 다녀갔음에도 기억을 못 할 뿐이라면, 이제 우리 인생은 이번 생애의 죽음에서 오는 공포심에서 해방되어 보다 밝은 삶을 살아가도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 ‘인생이 몸을 떠나면 영원히 끝나는 것’이며,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사랑하는 부모님 등의 죽음에 절망하고 가슴이 찢어졌던 내 자신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아들 딸이 태어났을 때 마음 속 깊이 기뻐했듯, 이 분들의 죽음 또한 이제 그 어려운 고통을 다 벗고 사랑과 평화의 극치인 본향에 재 출생하게 됨을 마음속으로부터 축하해 드렸어야 옳았던 것이다.
물론 윤회를 부인하는 종교인, 기독교 신, 구교 신자들은 “성경에도 없는 윤회라니!”하고 펄쩍 뛰겠지만, 초대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 보면, 서기 325년 로마의 강자 콘스탄티니우스 황제의 지시로, 성서 속에 수십 차례 반복됐던 ‘윤회’라는 단어를 당시의 교황청 추기경 3백여 명을 동원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는 등, 지금까지 20회나 성서가 편집돼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 성서에 아직도 윤회의 흔적이 남아 있음은 “뿌리는 대로 거두리로다” 등 (말라기 4:5-6 / 마태복음 11:13-15,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는 신약의 세례 요한으로 환생), 욥기3:11-19, 전도서 1:4. 9-11 등) 일곱 군데의 성경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우주 만물과 함께 우리 인생의 끝없이 오고가는 생성과 소멸, 상실과 회복의 영원불변하는 순환 고리는, 현재 -미래 -과거 -현재 -미래 -과거로, 무한대로 지속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지금은 엄동설한일지라도 반드시 오고야 말 봄은 결코 ‘슬픈 봄’이 아닌, 희망찬 “찬란한 슬픔의 봄”(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며 시인 영랑도 노래했다.
문득 2천4백년여전 중국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인이오, 사상가인 장자莊子가 생각난다. 장자가 상처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역한 친구가 황급히 조문을 위해 장자를 찾아갔더니 울고 있어야 할 장자는 냄비 뚜껑을 악기 삼아 두들기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친구가 기가차서 “아니, 부인이 별세를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꾸짖자, 장자는 흔연스레 “몇 십 년 동고동락해 온 마누라가 갔는데 난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란 하늘의 뜻으로, 세상만사 순리대로 생멸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자연 순환 현상인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장자는 도인답게 죽음을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능력자요,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8백여 년 전 지도자인 잘랄루드딘 루미는 수많은 자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며 “윤회할 때마다 자신의 인생이 조금씩 향상되어 왔지 결코 후퇴한 적이 없었음”을 노래하고 있어, 인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계속 업그레이드 되며, 영원히 건재하는 인생이라니, 우리 모두 어떤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좌절할 필요 없는 얼마나 멋있고 숭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kajhck@naver.com <986/2015-08-0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