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9>

일본의 유명한 교토의 금각사

일본의 유명한 교토의 금각사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 <9>

경무대의 대형 일본 병풍을 치우게 하고

▲필자 김현철
▲필자 김현철

영랑이 중앙청에 근무하던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영랑의 눈에 비친 대통령 집무실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금각사를 그린 대형 병풍 그림이 뒷벽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니!
실망한 영랑은 이대통령께 “각하, 저 병풍은 일본의 유명한 금각사 그림인데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에 저런 것을 놓아 둘 수 있습니까? 외국 사절들이 볼까 두렵습니다.”라고 못 마땅하다는 듯 발언을 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저게 일본 사찰 그림이란 말인가? 누가 그런 말을 해 줘야 내가 알지! 당장 치우도록 사람을 부르게!”
일본 한 번 못 가 보고 미국에서만 살았기에 이런 걸 전혀 알 길 없었던 항일 정치가 이승만에게, 아첨밖에는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온통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여 독재 체제를 굳혀가던 이 대통령을 보면서 영랑은 적잖게 실망을 해오던 터였다. 이렇게 해서 경무대 집무실에서 금각사 병풍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후에 알려진 사실로는, 이 그림은 일본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집무실에 있었던 일본 국보급 미술품이었다고 한다.

친일파에 너그러웠던 영랑

평소 동료 문인들로부터 대인관계가 부드럽고 신의가 있다는 평을 들었던 영랑이 드디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자 차차 영랑 자택(신당동 290-74)을 찾는 문우들의 수가 늘어갔다. 여기에는 어느 친구 집보다 이 집의 술 안주와 음식 맛이 뛰어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문우들은 인정한다.
박종화(소설가), 이헌구(문학평론가), 서정주(시인), 박목월(시인), 이하윤(해외문학 번역시인), 김광섭(시인) 등 중량급 문인들이 드나들자 당시 대학 재학생이었던 영랑의 맏아들은 엄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질문을 드렸다.
“아무개 선생은 친일 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께서 그런 분과 교류를 하셔도 좋습니까?”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자식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영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말의 뜻은 알겠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먹고 살 수 없는 처지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점을 참작해서 악질 친일파가 아니라면 인재가 태부족한 현실이니 조국의 새 나라 건설에 일꾼으로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냐?”

주변을 놀라게 한 과격한 성격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항상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어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던 신사, 틈만 나면 조용히 고전음악 감상에 눈을 지그시 감고 심취했던 선비, 술에 취해 기분이 좋을 때면 양팔을 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오페라 아리아를 즐겨 부르던 한량, 누가 이런 영랑에게 과격한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1950년 1월 어느 날, 국방부 정훈국(국장 이선근) 측이 문인들에게 군가 가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술자리가 충무로 어느 술집에서 열렸다.
당시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현 예총 전신)’ 간부 10여 명의 문인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이던 시인 김광섭은, “한글 맞춤법 중 ‘없다’를 그냥 발음 나오는 대로 ‘업다’로 쓰는 게 좋으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폐지돼야 한다.”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적인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가면서 강조했다.
이 내용은 1933년 당시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잘 되어 있어서 이미 국민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후였기에 지식층에서는 이승만의 주장을 역겨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있던 다른 문인들은 대통령의 주장을 끈질기게 대변하는 비서관의 말에 토를 달아서 유익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지 입을 담은 채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했다.
그러나 영랑은 친일파 숙청을 위한 국회 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이승만의 친일파 옹호 자세 등 독선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터라, 친구인 김광섭 공보비서관이 무조건 대통령을 추종하는 언행을 하자 역겨워 그만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영랑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맞춤법 통일안 폐지에 무조건 반대다, 이유 같은 건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말과 동시에 자기 앞의 술상을 순식간에 엎어버렸다. 옆에 앉아 있던 문인들의 옷에 음식물이 튀고 엎어진 음식들로 방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날 술자리는 완전히 흥이 깨져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고 시인 박목월은 전한다. 강자의 눈치도 안 보는 순수하고 순정적인 영랑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50년 1월의 충무로 술집 사건이 있은 지 3 개월 뒤 영랑은 취임 불과 7개월여 만에 출판국장직을 사퇴했다. 1년도 못 채우고 직장을 그만 둔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데려 왔다는 영랑의 직속 상사인 공보처장이 국장 전결 사항까지 일일이 간섭하면서 영랑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 또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자적 자세를 알고는 그동안 ‘국부(나라의 아버지)적 존재’로 믿었던 지난날의 존경심이 실망과 반감으로 뒤바뀐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순수서정시인, 민족저항시인은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조직 사회에서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아부도 해야 하는 출세 길 같은 것은 너무도 모르는 영랑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다

악성 베토벤이 말년의 작품 ‘현악 사중주 130번’으로, 또 모차르트는 자신의 죽음으로 작곡을 중단한 ‘레퀴엠’을 통해 각각 자신들의 죽음을 암시했던 것으로 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상황을 꿰뚫어 본 사가들에 의한 추측된 내용일 뿐,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자신들의 입으로는 내 죽음이 닥쳐오고 있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발언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영랑은 문우의 죽음 앞에서 “다음은 내 차례일세.”라고, 분명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고 그 말대로 얼마 후 유명을 달리하여 문우들을 놀라게 했다.
1950년 6·25가 터지기 두 달 전인 4월 어느 날, 영랑의 휘문의숙(현 휘문중고교) 2년 선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석영 안석주(1901~1950,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곡가 안병원의 부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이날 서울 교외 망우리의 장지에서 영면관을 마지막으로 묻고 떼를 입힌 후, 문우 10여 명이 묘에 둘러앉아 소주 한 잔씩을 기울이며 고인의 회고담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한 분이 “자! 우리 중에 석영을 따라서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다음 차례는 누군가?” 하고 질문을 던지자 이에 좌중은 숙연해졌다.
한동안이 지나고 제일 먼저 무겁게 입을 연 사람은 바로 영랑이었다. 영랑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다음은 바로 내 차례일세.”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이 말을 들은 문우들은 모두 평소 건강이 충실한 영랑인지라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나 농담이라 하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그 일이 있은 지 5개월 후인 9월에 영랑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세상을 떴다. 그제서야 현장에 있었던 문우들은 입을 모아 “영랑이 농담 한 게 아니었어!” 하고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 영랑의 예언을 회상했다. <다음호에 계속> 734/201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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