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2> “부활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광복절 특집<2> “부활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2008-08-22, 07:55:00] 한겨레저널
이번달은 광복 63주년을 맞이하는 주간이다. 독도 망언 이후 다시 한번 한반도는 들끓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잠해질 것이다. 일제는 패전 이후 틈만 나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한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독도를 차지하기 위해 60여년 참으로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역사적 자료를 찾는 것은 물론 세계 각국에, 학계에 전방위적인 로비를 통해 영토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심는가 하면 망언의 수위를 조절해가면서 한국인들이 둔감해지길 기다리는 치밀함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문화적, 학술적 접근을 통해 그에 말려드는 한국인들을 지일파, 친일파로 만들고 그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면서 매수에 나서고 있었다. 일본 권력의 묵인 하에 일본의 깡패 조직인 야쿠자들과 손을 잡은 한국의 조직폭배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검은 돈이 한국의 연예계를 좌지우지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들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 많은 첩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를 염탐하고 지한파를 양성하면서 오랫동안 침략을 도모했듯이, 또한 개항기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지식인을 상대로 금품과 함께 한일합방의 당위성을 제공하였듯이 일본은 패전 이후 한반도의 재침략을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 친일파들을 키워나갔음을 알 수 있다.
본지는 이러한 사태를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번 특집은 1. 현재 한국 내에 있는 친일군상들의 실상을 알아본 후, 2.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이에 따른 3. 우리의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편집자>일제의 경제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

1. 일제에 의해 한국이 근대화되었다고?

“일제의 식민지 시대는 축복이었다.”
“친일 행위가 애국애족의 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못난 국민성이 과거사 왜곡뿐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겨왔던 것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의 저질 행위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인들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한국 유명대학인 고려대 명예교수였던 한승조 씨의 주장이다. 그는 2005년 일본의 독도 망언 당시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하여 교내 학생들의 항의 여론에 밀려 명예교수직을 박탈당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유는 될지언정 일정(日政) 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한승조 씨 주장의 근간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우익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자학사관비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일본의 학계에서조차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소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우익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 즉 스스로 못났다고 여기는 역사관에 의해 서술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과거 일본제국의 전쟁이나 식민지배 등이 결코 일본의 ‘죄악’이 아니기에 전쟁이나 타민족 학살 등에 대하여 ‘과거의 실수를 반성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기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승조의 역사 인식의 근본은 식민사관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그가 얼마나 매국적 학자인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교묘하게 한국인들의 역사 의식을 왜곡시켰는데, 논리의 핵심은 식민사관의 한 부분인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이다.
일제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은 고대에서 발전이 없이 그대로 정체되어 왔다는 것이고, 항상 외국에 의해 조정당하는 국가였다는 주장이며, 이러한 주장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반영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로 일제의 한국병탄을 정당화하고 광복 이후에는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인들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고 경제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논리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적 경험의 유사성은,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식민주의 사관’이 당시 친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들의 생존 논리로 사용되었다면 종전 이후에는 일본 학자들의 ‘식민지 시혜론’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전하고 그것을 신 친일파들이 수용하여 자신들의 처세 나아가 정치적 입지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을 침략, 강점하였고, 강점하자 ‘수탈’의 정도를 넘어서서 세계 식민정책사상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민족말살’ 정책을 감행하였다. 식민지 한국은 단지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식량공급지, 원료 공급지, 상품 판매시장, 노동력의 공급지이며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일 뿐 아니라 그것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민족형성 요소들인 언어, 문자(한글), 민족사, 성명, 민족의식, 민족교육을 말살하는 식민지 교육을 강제적으로 시행하였던 것이 식민지 시대의 실상이다. 우리 민족은 거기에 맞서 국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인 것이다.

2. 일제에 의해 고통받은 노동자, 농민들의 참상

“노동자의 생활 – 어두컴컴한 공장에서, 감독의 무서운 감시와 100도에 가까운 열도 속에서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육골이 쑤시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는 대개 15∼16세 혹은 20세 전후로 그 대부분은 각지 농촌에서 모집되어 온 것이다. 그들은 하루 최고 15∼16전으로 6∼7년 동안 이런 환경 속에서 괴로운 훈련을 겪은 다음에야 겨우 40∼50전을 받게 된다. 기숙사라고 해도 한방에 10명씩이나 처넣고 수위가 계속 교대하며 그들을 감시하여 극도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노동 시간은 길고 식사는 형편없어 그들의 영양 상태와 건강은 극도로 악화하고 있다. 이 여성들의 낯빛은 마치 중병 직후의 환자와 같고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하여 졸도하는 일이 허다한데, 공장 내에는 특별한 규율이 있어 조금이라도 그 규율을 어기면 즉각 매를 맞는 형편이다.”[<조선중앙일보> 36. 07. 02]

위에 인용한 글은 당시 일제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한 보도기사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는 윗글은 일제가 식민지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병탄하였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노예와도 같이 취급당하고 있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살아왔다면 식민지 시대가 축복이었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에게 무어라고 할까 궁금할 뿐이다.
한 통계를 본다면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할 당시인 1910년에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0.71석이었던 것이 1919년 0.62석, 29년 0.44석, 44년 0.56석으로 점차 줄어두고 있는 것을 볼 때 일제치하에서 경제가 성장하여 한국인의 복지가 크게 개선되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학자들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또한 일제가 식민지 초기에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는데, 지금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 혹은 땅 지키기 소송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후기부터 발전되어 온 토지 사유제를 근대화한다는 미명 하에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면서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를 박탈하고 국유지로 강제 편입시킨 다음 국유지 불하방식으로 일본인들에게 넘겼으며,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해 이용하였다. 농민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를 강제로 뺏어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일본의 근대화의 시작이었다면 산미증산 계획과 식민지 공업화는 본격적 식민지 수탈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GDP가 상승하였다는 이유로 식민지 시혜론을 옹호하고 있지만 일제가 패전 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440억 엔이 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논리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3.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데 이어,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전시동원체제가 강화되면서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을 펼쳐나간다.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미명 아래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구호를 집회 때마다 제창하는 것을 비롯, 신사참배(神社參拜),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또한 1938년에는 한국인에게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고, 교육령을 고쳐 중등교육에서 조선어학과를 폐지하는가 하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결성하여 징병과 징용을 통하여 한국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몰기도 하였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발발)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위안부 제도를 만들어 일본군의 관리 하에 인권 유린을 자행했는데, 10대 초반부터 40대까지의 여성을 취업을 미끼로 끌려갔으며, 유괴나 강제 연행 형식으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 일본군이 직접 나서거나 군의 협조 하에 민간인이 동원을 담당하였다. 여성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로 성행위를 강요당했으며, 패전 후에는 퇴각하면서 위안부들을 한데 모아 죽이는 일까지 자행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여 우리 민족은 19세기 말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 거족적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준 삼일운동이다. 그러나 일제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인 삼일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일운동은 이후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이 지양되고 무장항일투쟁이 주도적인 독립운동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즉 국내 각 지역의 무장항일투쟁단체인 의용단(평양), 보합단(의주), 구월산대, 천마산대가 만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광복군 사령부와 연결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간도 등 국외 지역에서는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국민회군, 혈성단 등이 활발히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는데, 대표적인 전투는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김좌진) 등이 꼽힌다.
이에 일제는 간도 참변(경신참변), 자유시(소련, 만주 국경) 참변 등을 자행하여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과 방화를 일삼으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말살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 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역을 옮겨 다시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폭탄 투척을 통한 저항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독립운동 세력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임시 정부 산하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여(1940년 충칭) 대일 선전포고(1941)를 발표하고 중국군과 연합군 등과 협력하여 대일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경제, 문화, 인권적 수탈을 무시하고 일본의 우익 인사들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학문적 근거로 삼고 있는 친일파 지식인들과 자신들의 정략이 이익에 맞다고 무조건 받아들여 민족을 분열시키고 있는 정치인들의 머리 속에는 민족의 험한 역사적 수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의 선조들은 일제 시대에도 친일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친일청산을 방해하여 그것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의 상층을 형성하고 있는 계층의 연원에는 친일의 더러운 오명이 자리잡고 있기에 친일 청산은 멀고도 험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일본의 우익과 정치인들은 때만 되면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고, 망언이 없을 때에는 한국 내의 친일파들이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에 동조하고 한국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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