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독도는 왜 한국땅인가<2>

<특집> 독도는 왜 한국땅인가<2>

독도 영유권, 한반도 영토 선긋기 경쟁..

한국전쟁 전후 혼란기를 틈탄 일본의 재침야욕 !

독도 영유권, 한반도 영토 선긋기 경쟁..

맥아더 라인 – 이승만 평화선 – 日 ABC 라인 – 클라크 라인

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미국과 한국 및 일본이 서로 대한민국 영토를 규정하는 한반도 선 긋기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영토에서 군사 기지를 사용하여야 할 입장에 놓인 미국이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9월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는 독도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 독도를 지켜야하는 소명의식을 다음과 같은 성명서로 국민들에게 알렸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 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도는 동해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 떨어져 있고, 주로 동도(19,605평)과 서도(27,800평) 등 2개의 섬 및 주변의 36개 작은 암초들로 구성되어있으며 총 면적은 56,416평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섬 독도가 지닌 국제적 지위를 포함하여 국가 자산적 규모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뿐만 아니라 러시아 및 일본에 대한 중요 군사적 교두보의 위치에 있다. 특히 독도는 일본 영토의 섬인 오키시마로부터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또한 독도의 영토권은 주변 해역 12해리를 한국 해역으로 보장받으며, 이에 따른 수산 자원 및 해저 자원 등이 한국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국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대로부터 한국의 영토라는 점에 대하여 일본의 식자층도 커다란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주장은 이러하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직후 1904년 2월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독도를 대 러시아 전쟁 병참기지로 이용할 근거를 마련하면서 1905년 2월 독도를 일본의 시네마현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전승의 힘을 빌어 1905년 11월 한국 땅 전체를 지배하고 자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은 1945년 8월15일 연합군에 항복하고 한국을 독립시켰지만, 독도는 일본이 탈취한 것이 아니고 1905년 2월 합법적으로 편입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에 반환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로써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무효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에 관한 각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맥아더 라인”의 초석으로 활용되었다.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은 일본의 남획을 막기 위하여 일본 열도 주변에 일정한 선을 긋고 일본어선이 독도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서 일본으로부터 영토를 빼앗긴 한국은 연합국의 도움으로 독도를 포함한 영토를 되찾게 된 것이다.

한편 1951년 9월8일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한국 영토 반환에 대한 최종적 종지부를 찍는 조약인데 당사자인 한국은 참여하지 못하고 다만 조인식 때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로비로 인해 독도가 한국영토라고 명시한 근거가 사라졌지만, 또한 독도가 일본령으로 한다는 적극적 규정도 없다.

1952년 4월28일 미-일 평화조약 발효일을 3일 앞두고 맥아더 라인이 폐지될 것이라고 통보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18일 서둘러 평화라인을 선포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미-일 평화조약과 관련하여 󰡒평화조약에서 독도가 빠진 것은 독도가 한국 영토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조약 발효 전에 서둘러 한반도의 평화라인을 규정한 것이다.

대한민국 영토를 당당히 규정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은 남쪽으로 제주도와 마라도를, 동쪽으로는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금을 그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라인 공표 10일후인 1월28일 일본 외무성은 공식 외교서한을 주일대표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보내면서 󰡒평화선은 국제법상 공해 자유의 위반이며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연합군이나 미국을 제치고 한국과 일본과의 직접적인 독도 영유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여하튼 이때부터 미국과 연합군들은 한반도 영토와 관련하여 독도에 관한 문제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한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미국의 군대가 일본령 오끼나와 섬에 상주하고 있을 때, 한국의 정세는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미-일 SOFA 합동위원회에서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인 양 미군에게 전투기의 폭격연습장으로 공여한다. 그리고 일본은 1952년 5월16일 의회의 의결을 거쳐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켄에 포함시켜버린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미국이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정했다”하면서 독도영유권에 관하여 공식 외교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그러던 가운데 1948년 6월30일 불상사가 일어났다. 미군의 폭격 연습계획을 모른 채 독도에 출어했던 어민 30여명 가운데 1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남의 영토를 제멋대로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태도 문제였지만 인명을 헤치는 폭격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가 발동하자 미국 제5공군은 정식으로 사과하고 1953년 2월27일에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도를 미공군의 연습구역에서 제외시킨다.

그리고 나선 일본은 1952년 7월13일에 이른바 ABC 라인을 설정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라인에 대응한다. 해상보안청 순시구역이라는 이 선의 안에는 독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이때부터 2개월 남짓 지난 1952년 9월27일에,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국제연합총사령관인 클라크 대장은 전시 밀수품을 막고 적의 해상침투를 봉쇄하기 위하여 한반도 주변에 해상방위 수역을 선포했다. 이것이 유명한 클라크라인인데, 독도는 물론 이 클라크 라인 안에 포함되어 일본이 그은 ABC 라인을 무효화시켰다.

이렇듯 미국과 한국 및 일본이 서로 남의 땅에 금을 그으면서까지 공방전이 치열한 1953년도, 일본의 어선들이 무한정 독도 해역에 몰려와서 어획량을 휩쓸고 있었다. 이에 보다 못한 울릉도 거주 어민 홍순칠씨가 스스로 󰡐독도 의용수비대󰡑를 결성했다. 홍순칠씨를 대장으로 하는 청년들은 1953년 4월20일 독도의 서도에 도착한때로부터 3년 8개월 동안 독도 및 독도 해역을 지킨 것이다. 이후 경상북도 울릉군 경찰서가 독도 수비를 맡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비호 하에 일본 어선의 도발이 왕성해지고, 더군다나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자위권의 동원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자, 이승만 정권은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4년 11월30일 한국 정부는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경비정에 포격을 가하고, 계속 침범이 자행될 경우 전투기에 의한 폭격까지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한국정부의 결연한 의지를 파악한 일본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었고,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법적분쟁󰡑으로 보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독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영토이며, 법적 분쟁 지역이 아니라는 결론에서 부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5년 한일회담 장소에까지도 일본은 끊임없이 일관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부족한 자원과 경제발전 기금이 절실하게 요구되어 국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던 1963년, 한국은 일본에 보상 청구권을 주요 골자로 하는 한일기본관계 조약에 서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확정시킨 평화라인을 폐기했다. 양측은 대신 울릉도를 한일 󰡐공동규제수역󰡑에, 독도를 󰡐공동자원조사수역󰡑에 분리 귀속시킴으로 해서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의 지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정부의 큰 역사적 과오였고, 그래서 일본은 일본대로 내놓고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준것이다. 1963년 6월10일자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서 당시 정치학과 3학년 학생인 현승일군은 “평화선의 양보는 국토의 매각이다”이라는 시론을 실어 구민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이 시론이 발표된 때로부터 약 9개월 후인 1964년 3월24일 “대일 굴욕외교”를 규탄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촉발된 것이다. <550호/200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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