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헛되고 헛된 우리네 인생

<김명열칼럼> 헛되고 헛된 우리네 인생

얼마전 나는 오랫만에 볼일도 있고 할일도 많아서 시카고에 다녀왔다.

그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부득불 일정을 미루다가 큰 맘 먹고 그곳을 다녀왔다. 시카고는 내가 일찍이 젊었을 때 이민의 첫발을 딛고 미국에 뿌리를 내린 나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40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온갖 삶의 희노애락이 믹스돼 꿈과 희망을 실현시켜준 곳도 이곳이다. 그래서 아직도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탬파에 와 살고 있지만, 은퇴를 하기 전까지 모든 삶의 터전이 그곳에 묻혀있기에 아직도 미련이 크게 남아있다. 40년 동안 살면서 그곳에는 인연을 맺고 서로가 마음을 나누며 가깝게 지낸 친구나 지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봐도 내가 인연을 맺고 알고 지냈던 분들은 거의가 다 참으로 착하고 선하며 좋은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곳에 가보니, 그렇게 가깝게 지내고 취미생활이나 믿음생활을 같이 하며 지냈던 분들이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이별하고 하늘나라가 있는 멀고먼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나가신 분들이 꽤나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어느 사람은 물질과 재산을 많이 늘려 부족함 없이 세상을 넉넉하게 즐기며 부유하게 살다가 간 사람도 있고, 또 어느 사람은 무지하게 직사하게 고생만 하다가 간 사람도 있으며, 또 어느 사람은 무척 고생을 했으나 부지런하게 노력하고 근검절약을 한 덕분에 풍요로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즐기며 살만하다 했는데 그만 어이없게도 코로나19에 확진되어 아쉽게도 생을 쓸쓸히 마감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며 자신은 건강이 좋아 백살은 너끈히 넘기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하며 자기의 건강을 자랑했던 분이 있었다. 그는 해마다 한국에 나가서 생사탕(뱀을 넣고 만든 한약제?)을 몇십년 동안 먹어서(그의 말대로라면 약 500마리는 족히 먹었다고 함) 자신의 건강은 누구보다도 양호하고 엄동설한의 강추위속에서도 반팔, 반바지를 입고 살만큼 추위도 안타고 건강했던 사람인데, 이번에 올라가 보니 몇달전에 그 사람은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갔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스토롱맨, 또는 뽀빠이 철인(鐵人)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는데 이렇게 허무하고 덧없이 이 세상을 떠나갔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때 줄곧 한의학 건강강의를 도맡다시피 한 한의사 선생님도 가셨고, 몇십년동안 나의 담당의사로 한인사회를 위해 의료봉사를 하신 어느 내과전문의 선생님도 60대 인생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세상을 이별하고 그렇게 속절없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저세상으로 사라져 갔다고 생각하니 세상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 너무다 덧없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인생길에 접어든다. 태어나고 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네 인생은 그렇지 않아도 허무한 것인데 더 덧없게만 느껴지는 것은, 앞만 보고 살아가는 특성 때문일 것 같다. 세상사람들은 항상 앞만 보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좌우를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살아가고 있다. 토마스 호헨제는 성공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이렇게 지적했다. “무언가를 진실로 원하면 이루어진다.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성공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에 달려있다” 문제는 그 말들을 믿고 한눈팔지 않고 앞으로만 갔지만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는 것이다. 바퀴벌레는 앞으로만 밖에 갈 줄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도 옆으로도 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꽃피는 봄이 있고 청춘의 여름이 있으며 낙엽지는 가을 후에는 반드시 엄동설한의 추운겨울이 닥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언제나 꽃피고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봄과 여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고서….. 그때라도 인생의 덧없음을 알고 한박자 늦게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인생이 덧없음을 느끼고 있는가? 그것은 인생에서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통찰로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삶에서 영원한 것이 없다는 무상관(無常觀), 일체가 깨끗하지 않다는 부정(不淨)관,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관 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하늘아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러한 자아 통찰을 통하여 인지했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괴로움도 기쁨도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유한적(有限的) 임을 알기에 나르시스처럼 이성적인 사람이 있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골드문트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엔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으며 시험이 드는것이다.

몇년전 한국의 어느 지방신문에 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대전에 사는 어느 나이드신 어르신은 교통사고로 부인을 몇달전에 잃었는데, 젊은 가해자가 돈을 갖고 합의를 보려고 찾아왔을 때 그는 돈을 거부하고 이런 제안을 했다. “나는 부인을 잃었지만 얼마후(죽은후) 다시 만날 수 가 있소. 젊은이도 나의 부인처럼 하늘나라에 갈수 있도록 신앙을 갖는다면 합의금도 소용없소”. 이 말을 한 후 그 어른은 가해자에게 오히려 백만원을 주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의문은 ‘인생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다. 성경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인생은 영원한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짧은 생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영원한 본향을 대비하는 것이 과제인 것이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영원한 것을 대비하는 사람이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얻어야 한다.

일시적 소유를 영원한 부(富)로, 순간의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바꿔야 한다. 그에대한 방법이나 가르침으로는 세상의 유일한 신인 하나님(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인생이 덧없이 느껴지는 것은 모든사람들은 결국엔 죽음앞에 홀로 서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게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살면서 만족한 사람이 없기에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적 삶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죽음속에 삶이 있고 삶속에 죽음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먼곳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알고 하루하루의 삶이 더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때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이곳이 혹시 딴 세상이 아닌가? 하고 두리번거리며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며 신 앞에서 홀로 서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신은 나의 모든것을 보고 있으므로 나 외에 그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넘길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얼마나 고독한 일이던가…….. 서양에서는 합리주의가 계몽주의로 발전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자율적 선

택의지를 강조하는 반면에 비해, 우리네는 개인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자신을 신 앞에 세우는 일이 그들보다 부족하여서 더 어려워지는 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이렇게 짧고 덧없는 삶에 관해 글을 쓴 것을 보고 혹자는 나를 비관주의자, 염세주의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 인생 삶에는 의미 있는 것도 많고 아름다운 것도 많으며 또한 즐겁고 기쁜 것도 있는데, 왜 계속 인생 삶을 짧고 덧없는 것이라고 하는 걸까?…….하고! 그러나 나 역시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나 또한 삶(인생)은 의미가 있고 충분히 살만한 것을…. 다만 그 전체가 짧고 덧없다는 삶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 바탕에서 쌓아나갈수 있다고……..즉 인생 삶이 짧다는 것, 그리고 덧없다는 것을 인식하여야만 짧은 인생을 어떻게 누릴지 고민할 수 있고, 덧없는 것을 알아야만 사회가 주입하는 가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해나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런 맥락에서 짧고 덧없는 인생 삶에 관하여 글을 썼다. 삶이 짧다는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 체험의 영역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간다고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이라는 것은 저항할 수도 없어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일방적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면 나는 매 순간 순간이 아쉬어서라도 인생을 강하게 잡고 나만의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싶다.

또 덧없다는 부분 또한 주관적 가치관의 영역인데, 흔히 죽을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돈은 우리들 현실 삶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나 또한 그 생존영역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돈 버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다만 돈에 나의 인생을 올인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삶을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물질적인 것에 전부를 배팅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로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나 인생을 초월하는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돈을 쓸 시간을 만들고 ‘여행 및 취미활동’으로 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쪽을 선택한다. 때문에 나는 나의 이러한 삶의 가치관을 후회 없는 삶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으면 후회도 미련도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최소 죽음 앞에 서서 인생을 관망할 때 최소한의 후회만이 남기를 바랄뿐이다. 나는 덧없고 짧은 삶이라는 이런 강력한 인식덕분에 하루의 의미를 찾을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마음적 여유도 생긴 듯 하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덧없기 때문에 더욱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느껴진다.

별도의 이야기로, 이제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하기전에 꿀 팁 한가지를 선물해드리겠다.

팁의 제목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고정관념’이란 틀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데, 요는 ‘고정관념 없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 그 목적과 이유다.

어느 절의 주지스님이 마당 한가운데 큰 원을 그려놓고는 동자승을 불러 “내가 아랫마을에 다녀왔을 때 네가 이 원 안에 있으면 오늘 하루종일 굶을 것이다. 하지만 원 밖으로 나오면 이 절에서 내 쫓을것이다” 그러고는 스님은 마을로 내려갔다. 동자승은 참으로 난감했다. 원 안에 있자니 가뜩이나 배가 고픈데….. 하루종일 굶어야 할 것이고, 원 밖에 있으면 절에서 내쫓김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겠나? 그냥 하루 종일 굶는 길을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절을 나가야 할까? 두어시간 후에 드디어 주지스님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동자승은 하루종일 굶을 필요도 없고 절에서 내 쫓김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했었던 것일까?.

동자승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당 한구석에 놓인 빗자루를 가지고 와서 스님이 그려놓은 원을 쓱쓱 쓸어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원이 없어졌으니 원안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원 바깥에 머문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 그는 원을 없애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원을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질이라는 원, 명예라는 원, 욕심이라는 원, 미움이라는 원,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원으로 인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그 원을 지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라는 원! 이 원을 과감하게 지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문학 작가 김명열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312/202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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