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잠들지 못하는 가을밤의 사색

<김명열칼럼> 잠들지 못하는 가을밤의 사색

이제 가을의 중심인 10월달에 접어들었다. 산야에 흩어져 제멋대로 자라고 피고 지는 꽃나무나 들풀, 그리고 노오랗게 물드는 은행나무도 모두다 가지각색의 색동 옷들로 갈아입고 한껏 자태를 뽐내볼 시절이다. 지독히도 무덥고 긴 여름의 폭염에 쪄진 헤픈 웃음도 맑아지는 계절이다. 바람이 제법 시원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해졌다.

한국의 강원도 평창 봉평에서 대화까지 칠십리길에 이제는 하얀 메밀꽃도 지고 메밀의 열매가 익어갈 때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추수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가을이 되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도화지 위에 파란물감을 뿌려놓았다. 오늘밤에는 어제와 같이 귀뜨라미의 노래 소리가 들릴까?. 해가지고 어두워지면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호젓한 가을밤이 되면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서 창문을 열어놓고 귀뜨라미와 온갖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를 듣는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가을밤 옛날 어렸을적 고향마을 동네친구들과 즐겨불렀던 노래가 문득 떠오른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나 홀로 앉아서/ 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그때 그시절 그 노래를 함께 불렀던 옛 동무들이 생각난다. 이제 나이도 들고, 머나먼 이국땅에 오랫동안 살다보니 고향생각을 하면 공연히 눈물이 생겨난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눈물, 또 외로워짐이 아픔이 되는 가을밤………

앞마당 멍석위에 깔고 누워있는 반질반질한 붉은 고추, 불그죽죽 토담 옆에 키다리처럼 서있는 대추나무의 대추알, 초가지붕 위에는 보름달만큼 커진 하얀 박, 누렇게 익은 벼이삭, 씨~익 웃는 보름달, 해가지는 서쪽, 저~멀리 끝없는 수평선과 지평선 수만리 너머에는 고향이 있다. 그 고향을 떠나온 지도 몇 수십년, 마음속에만 두고 한없이 멀리 떨어져있는 나의 몸…….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계절, 그 가을이 흘러가고 있다. 가을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늘하늘 피어나 춤추듯이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청순한 모습이다. 행길가에, 우리집 담장 뒤로, 장독대 옆에, 예쁜 코스모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며 아름다운 가을을 노래한다. 하늘을 보며 활짝 웃다가도 내가 바라보면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건네는 것 같이 다정한 모습, 그들의 모습에 푹 빠져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내내 코스모스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며 인기를 한몸에 받는 스타가 된 것이다. 아마도 지금쯤 내 고향 마을에는 이렇게 코스모스 꽃이 사방에 피어나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가을의 노래와 이야기를 쉴새없이 지껄여 대고 있을 것이다.

가을은 우리들 인생에 비유하면 환갑을 갓 지내고 60대에 들어선 초 노년의 인생을 표현하기도 한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가꾸고 꾸려나가야 겟지만, 막상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은 그렇게 녹녹치가 않다. 인생을 이야기 하다보니 얼핏 생각에 톨스토이의 나그네 인생이 생각난다. 인생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말하는데, 내세(來世)를 믿는 종교계에서는 인생은 잠시 이 세상을 살다 가는 나그네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종점이 가까워진 노년기 사람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톨스토이의 참회록(懺悔錄)에는 아주 유명한 다음과 같은 우화(禹話)가 있다.

어떤 나그네가 광야를 지나다가 사자가 덤벼들기에, 이것을 피하려고 물이 없는 우물속으로 피신을 했다.

그런데 우물속에는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없고, 우물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나그네는 우물안의 돌 틈에서 자라난 조그만 관목(灌木)가지에 매달리고 있었다. 우물 내외에는 자기를 기다리는 야수들이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그냥 나뭇가지에 매달려 나무를 쳐다보니 검은 쥐와 흰쥐 두마리가 나뭇가지를 쏠고 있었다. 그러니 두손을 놓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그네는 우물밑에 있는 큰 뱀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고 그 나뭇잎 끝에 흐르고 있는 몇방울의 꿀을 발견하자 이것을 핥아먹는다. 우리네 인간들이 사는 모습이 꼭 이 모양이다! 라고 비유했다. 여기에서 ‘나그네 인생’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운명에 처한 것이다. 여기의 검은 쥐, 흰쥐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밤과 낮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한 70~80여년 밤과 낮, 검은 쥐 흰쥐가 드나들듯 시간이 다 자나가 버리면 마침내 매달렸던 나무가지는 부러지고 인생은 끝이 난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이 우리들 인생의 현 주소다. 톨스토이는 우리 인생을 향해 이렇게 도전하고 있다. “지금 아주 맛있는 꿀을 들고 계십니까? 그 꿀은 젊은 날의 향기와 인생의 성공으로 인한 부와 권력, 혹은 행복한 가정일수도 있습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 번쩍이는 새 차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검은쥐 흰쥐 그리고 고개를 쳐든 독사를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으며, 과거는 돌아갈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나의 미래는 먼저 간 사람을 보면 인생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 분명한 미래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나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야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삶을 연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뭇잎의 꿀을 핥고 있는 나그네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그네는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이고, 검은 쥐와 흰쥐 때문에 우물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 없는 미래의 전개될 현실이다. 다만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태어날 때 두 주먹을 쥐고 울며 태어나지만 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손뼉을 치고 축하해준다. 그러나 인생의 종말인 죽음에서는 두 손을 펴고 빈손으로 웃고 가지만, 주변사람들은 슬퍼하며 애도(哀悼)한다. 태어날 때 울고 태어나지만 죽을때 웃으며 간다는 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처럼 인생도 시작과 끝이 있는데, 이것이 출생이고 죽음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살고있는 ‘나그네 인생’은 검은 쥐와 흰쥐가 쏠고 있는 나무가 언젠가는 부러지면 종말인 죽음이 있음을 알면서도 현실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나그네 인생은 죽으면 흙으로부터 온 인생은 다시 흙으로 가고, 하늘로부터 온 영혼은 다시 본향(本鄕)인 천국으로 간다고 믿으며, 내세는 천당과 지옥이 있는데, 인생나그네는 선(善)을 행하며 산 인생은 천당으로 가고, 죄를 범하고 산 인생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인생은 연원한 내세(來世)의 준비를 위해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인생은 태어날 때 가진 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고, 초년의 삶은 ‘가진자가 되려는 준비단계’로 공부하는 단계며, 중년은 직업을 가지고 가진자가 되려고 ‘일하는 단계’이며, 말년인 노년은 가진 것을 베풀면서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이다. 노년의 ‘나그네 인생’은 ‘가진 것을 보람 있게 베푸는 삶’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한낮의 후덥지근한 온기를 후~후 불어가며 찾아온 시원한 가을바람은 가을을 싣고 왔다. 그러고는 무더위에 달구어 있던 우리의 살갗을 서늘한 바람으로 스치며, 영혼을 식혀주고 마침내 우리를 허무라는 지향 없는 방황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 가을은 하늘에서 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을 맑게 하고, 영혼을 슬프게 울리고, 고독이라는 끝 모를 시간 앞에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달이 밝은 가을밤, 창가에 서면 목까지 차오르는 무언가 모를 그리움,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쎄 그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어느 사람이 있어 이 가을의 막연한 그리움과 적막함과 서글픔의 정서를 분석하고 자세히 해명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무의미한 일일까. 무엇 때문이라고 그 명료함이 설명된다고 하여도 가을이 주는 적막한 우울과 그리움의 사색이 치유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가을은 태고로부터 그런 계절이며, 자연으로부터 태어남을 받은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그 정서의 회오리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랴.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가을의 긴 밤을 통해서 인생을 생각하는 깊이를 더했고, 학문을 연마했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삶인 것이다. 가을의 슬프고 애달픈 정서는 감상으로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 많은 일깨움을 주기도 한다. 더러는 머무는 것보다 떠날 때 맞춰 떠나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교훈을 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는 지혜를 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소녀는 소녀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의 빛깔은 같지만 그 내면의 느낌과 감정은 조금씩 서로 간에 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인생의 황혼길에 들어선 노인이 프라타너스 넓은잎이 떨어져 내리는걸 보며 느끼는 삶의 허무와 고적이,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뜻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과 그 농도나 깊이가 다를 뿐 감정의 흐름은 동일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휘엉청 달빛이 너무나 밝아 밖에서 불을 비추듯, 달 밝은 가을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보며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 그러한 가을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영혼은 곱고 착한 영혼이다. 가을 달을 지키며 가슴 저려 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가슴적시는 영혼은 지순하고 순결한 영혼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며 가식도 아니고, 철없음도 아니며 위선은 더 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고 오로지 혼자 느끼고 표현되는 것이어서 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밤을 쉽게 잠드는 사람의 영혼은 메마른 영혼이다. 가을 달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영혼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불쌍한 영혼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느껴야할 삶의 아름다움이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감정 없는 가엾은 영혼이다. 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자세를 갖게 하는 계절이다. 범속하고 약한 것이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일깨워주기도 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모두 용서해주라는 맑음을 선사하기도 하는 계절이다.

이 풍요롭고 풍성한 가을밤에는, 댓돌 밑에서 처량하게 가을 노래를 불러주는 귀뜨라미 소리를 들으며 한권의 책이라도 읽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권의 책을 읽음으로 그만큼 공허하고 메말랐던 내 머리와 가슴속에 마음과 지식과 교양의 양식을 저장하자. 기왕이면 이러한 가을밤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성경말씀 구약에 있는 잠언록이라도 읽어보자.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씩을 되새김 하여 읽어볼 일인 것이다.

그리하면 거기에 일상의 소란속에서 망각했거나 잊혀진 우리네 삶의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 하리라.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다. 그 혜택을 베풀면서 인간들이 지나치게 탐욕하거나 자만할지 몰라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허무감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함께 보내준 것이리라. 마음은 또 지향없는 길을 떠나 먼 하늘가를 헤매이리라. 일상의 생활이 아무리 건조하고 복잡하고 권태로워도 잠시라도 거기에서 벗어나 가득 가득 담겨오는 가을 하늘의 싱싱한 호흡을 마음껏 내 것으로 하자. 그리하면 이 인생의 어렵고 풀리지 않는 일들은 저절로 사라지리라.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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