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의 힐링 여행 기행문<3>

김명열의 힐링 여행 기행문<3>

수림 우거진 산속에서 힐링의 휴식.

 

<지난주에 이어짐>

산림욕이란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를 들여 마시며 숲속을 걷거나 머물러 있는, (또는 자리를 깔고 누워있는 것도 포함)것을 말한다. 이러한 산림욕은 산속에 산재해있는 각종 나무들로부터 청정한 대기를 쐬며 공기의 신선함, 시청각적 효과, 자연에서의 개방감이나 산속을 걷는 운동효과 등 종합적인 건강감에서 너무나 기분이 상쾌하고 편안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산림욕의 효과는 수목에서 발산되는 피톤치드라고 하는 방향성 물질이 살균효과가 있으며, 면역력이 강화돼 건강에도 좋다. 피톤치드란 숲속의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살균성을 가진 모든 물질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로 주위의 미생물 따위를 죽이는 작용을 한다. 산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깊은 산속,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몇십미터나 되는 키다리 나무 숲속에서 그냥 앉아있는 것도 휴식이고 쉼이다. 영혼과 육체가 그동안의 피로를 풀기위해서 산속에서 그냥 쉬는 것이다. 산길을 걸으며 사색하는 것도 휴식이고 조용히 바윗돌 위에 앉아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일종의 휴식이다. 이렇게 지내다가 목이 마르면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마시는 것도 좋다. 어깨에 짊어지고 온 배낭에는 간식거리의 과자나 음료수 과일 등이 있지만 깊은 산속에서 내려오는 깨끗하고 시원한 물맛이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어떠한 물보다 비교할 수가 없다. 값비싼 프랑스 에비앙이나 또는 한국에서 비싸게 팔리는 제주도 삼다수 물보다도 몇배나 맛있다. 해양 심층수에서 나오는 물처럼 미네랄과 산소가 풍부한 이 깨끗하고 시원한(차거운) 물맛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마셔보지 않고서는 아마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깨끗한 물과 공기를 마시고 나니 나의 몸 전체가 깨끗하게 정화된 기분이다. 몸은 피곤해도 머리 속은,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을 몇시간동안 아니 몇 달 동안 하고 난 후의 느낌처럼 맑고 정화된 상태그대로다. 내가 나무도 되고, 내가 바위도 되고, 또한 내가 저렇게 하늘높이 떠가는 뭉개구름도 되고, 물도 되는 그런 자연속의 나로 변하게 된다. 온몸이, 정신이, 영혼이, 다 비어져서 청아한 느낌의 상태를 여러분들께서는 경험해보았는지?………..

이러한 경험도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이 텅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모든 것이 자연의 한 물질속에 녹아져 있는 듯한 무아(無我)의 느낌이다. 이렇게 산속에 있으면서 또 다른 작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꼭 명상하고, 참선하고 요가를 해야만 무아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정신이 깨끗해지고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고행(苦行)에 이르는 것이 아마도 이러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몇달씩 아니 몇년씩 걷는 것도 아마 이런 고행을 하면서 얻게되는 無의 세계가 온몸과 마음에 녹아들기 때문이리라. 등산은 사람이 산을 오르내리는 단순한 운동이지만, 거기에는 사람에 따라 넓고 깊은 행위와 사상의 세계가 벌어진다.

깊고 푸른 산을 병풍삼아 바윗돌과 조약돌과 마주치고 조우하며, 만나는 돌마다 깨끗이 목욕을 시켜주고 재미있다는 듯이 혼자서 조잘대며 부지런히 아랫 쪽을 향해 달음박질치듯이 흘러내려가는 계곡물…….. 바닥속이 훤히 보이는 맑고 투명한 물에 나의 몸과 마음도 담가본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들의 노래 소리를 벗 삼아 물길, 계곡길을 걸어보고, 그러다 땀이 나면 양말 벗고 신발 벗고 두 발을 풍덩하고 물소리를 내며 담가본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차디찬 계곡물로 세수를 하고나면 정신이 번쩍 들며 여울져 흐르는 계곡물 물가 바윗돌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세태에 시달리며 짜증나는 도회지를 벗어나 허기진 마음을 자연에 의지하고 달래며 이렇게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가는 뭉개구름을 바라보며 심신을 다독이다보면 힐링이 따로 없다. 산속의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 모두가 힐링이 되는 자연의 소리이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 각종 벌레소리,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자면 어느덧 자연 한복판에서 산림욕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계곡물이 흘러가는 물가 바윗돌 위에 걸터앉아 심신의 휴식을 취하며 사색과 명상에 잠겨보기도 하고, 또한 다음주에 써 올릴 글에 대하여 머리속으로 구상도 해본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고 어렵다. 글을 읽는 사람은 읽고 감상하는 것으로 끝날 줄 모르지만, 좋은 글을 써 읽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어느 때는 한 편의 글을 작성하기 위해 며칠을 끙끙 거리고 생각하며 고생(?)을 한 적도 많았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문득 좋은 글의 소재가 떠오르면 차를 멈추고 메모지에 옮겨 써 놓았다가 나중에 살을 붙여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사람은 가끔씩 자기 스스로를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펜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하지 못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표현하여 쓴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서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써놓은 글을 컴퓨터로 옮겨 활자화해서 신문사로 송고한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이나 멀리 있는 친구 등 평소에 격의 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친한 사람들에게도 보내준다. 그러고 나면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에게서 댓글이 날아오고 칭찬이나 독후감의 메시지가 아울러 전달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지면위에 여러장 써놓은 글을 컴퓨터에 옮기고 그것을 신문사로 보낸다.

좋은 글은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글재주와 짜임새에 있어서 나무랄데가 없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글이 감동을 주는 요인에는 여러가지의 경우가 있다. 표현의 절묘함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작품속을 흐르는 정서가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작가의 안목이 감동을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얻기 위하여서는 나 자신이 여간한 노력과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오늘 이시간도 나는 체험과 사색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안으로는 나의 자아를 크고 깊게 성장시키고 있다. 즉 내적인 에너지가 쌓여가고 있다는 증거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나 답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오늘 하루는 이곳 저곳을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차를 몰고 많은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나무숲이 우거진 산속에 들어가 산림욕도 하고,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앉아 명상과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참으로 오랫만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깊은 사고와 사색속에 심취해보기도 했다. 사색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치는 특정 사실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볼 때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색은 결과를 내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다가서는 것이고, 길을 걷는 것처럼 육체를 움직이면서 정신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명상 역시 마음을 내 안으로 몰입시켜 내면의 철학적 자아를 확립하거나 종교 수행을 위한 정신집중을 널리 일컫는 말이다. 라틴어로 메디타티오(meditatio)라고도 하는데, 모든 생각과 의식의 기초는 고요한 내면의식이며 명상을 통하여 순수한 내면의식으로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러 많은 명상법들이 있지만, 그 기초와 바탕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인도인들의 명상법이 가장 정론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명상법은 요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각 종파에 따라 다르다. 선종에는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공(空)이나 무심(無心)의 상태인 무념무상을 목표로 삼았다. 밀교에서는 관심 혹은 관찰이라고 하며 명상을 통하여 신들이나 부처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도교에서는 명상 수행을 통해서 영원무궁의 세계로 통하는 진인을 수태하여 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기독교에서는 묵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신(God) 곧 하나님에게 몰입하여 신의 현존,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사랑의 계명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도록 이끌어주는 기도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명상은 사고력을 초월하여 실재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본래 메디타리(meditari)에서 주의하다, 밤새우다,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을 지니면서 영성적인 의미로 단련하다, 또는 수련하다 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 명상법은 성서에 기록되어있는 말씀을 꾸준히 반복하여 읽고 생각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한다. 때문에 기독교명상은 성서를 읽는 것이 중요하며, 읽은 로고스를 레마화 시키기 위해 말씀을 번복하여 되새김질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명상이 긴장과 잡념에 시달리는 현실세계로부터 의식을 떼어놓음으로써 밖으로 향하였던 마음을 자신의 내적인 세계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면, 사색은 의식을 인식하면서 정신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항상 타자나 외부에 집착하고 있는 의식을 안으로 돌려주므로 마음을 정화시켜 심리적인 안정을 이루게 하고 육체적으로는 휴식을 주어 몸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명상이라면 사색은 육체와 의식이 동일성으로 함께 움직이면서 바른 이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사색과 명상으로 참과 거짓 허상과, 실상 현상과 본질이 모두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사색과 명상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사실로 점검하는 여정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이며, 긍정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고,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색과 명상은 마음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이상적인 삶의 활동이라고 하겠다.

산 속에서의 사색과 명상 끝. <다음주에 이어짐>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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