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이 아름다운 춘삼월에……..

사진은 나의 집으로 들어오는 길 옆에 춘삼월을 맞아 노오란 꽃이 만개하고 그 꽃을 배경으로 파아란 하늘이 물감을 칠해 놓은 듯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오늘 오후, 찾아온 봄에 취하고, 꽃의 아름다움에 유혹되어 파란 하늘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명열칼럼> 이 아름다운 춘삼월에……..

어느 달 밝은 밤 나는 밤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에 높이 떠서 영롱한 불빛을 발산하며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며 숲길을 걷고 있었다. 달과 별이 조우하며 그들의 환하게 비쳐주는 불빛을 벗 삼으며 나의 마음은 자꾸만 벅차오는 듯 한 밤이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달빛과 별빛은 때 묻은 나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듯 했다. 어둠으로 주위는 검은 커튼을 드리운 듯, 만나는 사람도 없이 밤마다 거니는 길에서 나는 아름다운 밤의 꿈을 지녀보는 것이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배고픔 같은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남모르는 그리움을 지니고 사는듯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배고픈 존재이다. 진리에 굶주리고, 사랑에 메마르고, 우리의 영혼은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자신이 머무는 집으로 고통을 당하고, 돈으로 인하여 보모 형제와 등을 돌리고, 또 젊은이들이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사랑보다는 조건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고, 마음에 갈피를 못 잡아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은 웬일인지 밤늦도록 잠이 오질 않는다. 머리맡 유리창으로 밝은 달빛이 쏟아진다. 코로나19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며 고통속에 죽어가는 이 슬픈 시대에, 그래도 아름다운 꿈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언제나 아름답고 깨끗한 생각들을 버리지 않는 적은 무리를 기억에 담아본다. 지나간 날의 즐거웠고 또 행복했던 추억을 더듬어 앞날의 새로운 꿈을 꿈 꾸어본다. 우리들 곁에 찾아온 이 3월을 봄이라고 한다. 그래서 속칭 춘3월이라고 부른다.

화사한 봄의 햇살이 나를 자꾸만 유혹해 창밖을 내다보며 세상을 바라본다. 무슨 희망과 새로운 기쁨이 찾아올 것만 같은 생각에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화려한 봄빛을 타고 가슴에 다가올 듯한 마음에 나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막연한 기다림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먼저 봄이 변화시킬 세상을 기다리고, 그것이 가져올 새로운 희망과 기쁨에 가슴을 채운다. 꽃과 나비와 따스한 햇볕도 부드러운 손길로 옴 몸을 포옹해준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나무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오늘처럼 이렇게 숲길을 한없이 걷고 싶다. 파아란 하늘위에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꽃나무 가지를 가볍게 흔들고 떠나가는 바람소리에 가슴을 적시며 꽃그늘 숲에 앉아 쉬고 싶다. 이렇게 고대하고 기다렸던 봄이 비록 현실에서 만족할만한 아무런 해답이나 해결을 가져오지 못할지라도 봄의 아름다움에 묻혀서 살아야겠다. 그 밝은 햇빛 아래서….

어둠의 밤과 하늘을 벗 삼는 낮….. 우리의 하루는 낮과 밤의 시간으로 구성되며, 밤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이자 숨겨진 내면을 상징한다. 어둠이 주는 불안함의 감정은 밤에게 고뇌와 죽음, 슬픔과 비탄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세계와 시작,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치유와 휴식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루소의 표현처럼 밤의 휴식은 자연스러운 섭리이다. 밤은 고요하고 달콤하게 세계속의 모든 존재들에게 스며든다. 밤이 깊어질수록 태양에 뜨겁게 달구어졌던 대기는 식어가고 햇빛 아래에서 우리의 눈을 자극했던 모든 이미지(Image)들은 잠잠해진다. 더불어 우리의 감각과 정신도 안정을 찾게된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하늘과 별과 달과 그리고 세계속의 존재들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나 자신의 실존과 평화를 느끼는 감동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밤이야 말로 세상의 존재들을 진정으로 지각(知覺) 하고 경험하며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낮에는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시야에 들어오기때문에 필요이상으로 시각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완전한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이 재현하는 이미지들이 아무리 가시적 세계와 비 가시적 세계 모두를 형상화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인간이 가진 하나의 감각에 의존해 지각한 부분이자 근사치일 뿐이다. 그것은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없다. 빛이 사라지는 밤에는 많은 이미지들이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존재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덜 보이는 상황은 촉각과 후각을 비롯한 온 몸의 감각들을 통해 대상을 느끼고 세계속 존재들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밤에는 달이 떠서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춰주고 대지의 암흑도 희석시켜준다. 예로부터 달은 상상력과 창조력, 영감(靈感)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동시에 그것은 흐르는 시간의 순환을 상징하며 원형(圓形)의 시간을 내포한다. 그 형상이 불변하는 해와 달리 달은 변화를 내포한다. 달은 초승달에서 보름달, 그믐달을 지나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달이 그렇듯 식물들도 해마다 소생(蘇生)하고 동물은 생장하며, 계절과 우주의 흐름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달은 태어나고 생장하고 죽는 존재의 역사를 되풀이하며 구현한다. 변화하는 그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원한 회귀를 나타낸다. 결국 어둠속에 뜬 달은 불분명함과 분명함을 만나게 하는 중간지점을 창조한다. 그리고 이 모호한 중간지점은 우리들에게 창조적 몽상으로 이끌기도 한다. 또한 달이 뜨는 밤에 예술가는 자신의 직관적인 내면에 집중하여 상상과 창조를 이끌어낸다.

밤이 깊어지고 사방은 적막하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도로를 질주하며 미친 듯이 속력을 내며 달려가던 미치광이 운전자의 그 굉음소리도 멎은지 오래고, 길 건너 소나무 가지 위에서 쩝쩝대며 울부짖던 이름 모를 새소리도 사라진지 오래됐다. 이렇게 야심한 깊은 밤에, 나홀로 서재에 앉아 글을 벗하고 펜대를 바쁘게 놀리다보니 어느듯 방안을 비춰주는 등불빛도 졸리운듯 깜박거린다. 이런때 불현듯 머리속에는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깊은밤에 홀로 앉아있을때에야 비로서 진심을 알수 있다는 문구가 떠 오른다. 야심인정독좌관심(夜深人靜獨坐觀心), 시각망궁이진독로(始覺妄窮而眞獨露) 이 문장의 뜻 을 풀이하자면, 깊은 밤 모두 잠들어 고요할 때 홀로 앉아 제 마음을 살피노라면 비로서 망령된 마음이 사라지고 참 마음만이 오롯이 나타남을 깨닫게 된다. 덧붙여 해설을 보탠다면, 진심과 망념(妄念)은 한 개념속의 둘이지, 두 개념속의 하나하나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상충되는 두개의 마음, 즉 이성(理性=선 善)과 본능(本能/악惡)이 있다. 진심과 망념이 따로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되, 진심과의 대면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충고의 말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판단을 분명히 하고, 자기비판에 냉철해야 한다. 인간이 진실로 숭고한 인간적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속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의 처절한 자기투쟁 없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낮에는 구름 한점 없는 맑고 쾌청한 얼굴을 하루 종일 하늘은 보여주었다. 하늘은 사람의 마음 만큼이나 다양한 얼굴모습을 가지고 있다. 어느날은 구름 한점 없이 오늘처럼 쾌청하고 맑다가 곧이어 먹구름이 끼고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든가, 아니면 천둥번개가 천지를 흔들며 귓고막이 떨어져라 벼락치는 소리를 질러대더니 얼마 안가서 우뢰광풍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투명한 푸르름을 동반한 밝고 화사한 햇살이 대지를 포옹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수시로 변하는 하늘을 보노라면 정말로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운거운래천본정(雲去雲來天本靜)이요, 화개화락수상한(華開花落樹常閑)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가거나 말거나 하늘은 본시 고요하고, 꽃이 피거나 지거나 나무는 항상 한가롭다는 뜻인데, 이 말뜻을 새겨본다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하늘은 언제나 그자리에 있다. 다만 구름이 수시로 오갈뿐, 본래의 모습은 청정하다. 이런 모습을 볼때마다 사람이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본성 자체는 청정한데 지나친 욕망과 욕심이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는지 모른다. 하늘은 우리들에게 사색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인들 다수가 하늘을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드려다 보는 게 일상사가 되고 말았다.

직립보행을 하고나서야 인간은 비로서 하늘을 쳐다보게 됐으며 그때부터 하늘은 인간에게 사색의 힘을 제공했다. 그러나 점점 그런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사색보다는 검색을 먼저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색만으로는 인간다운 심성을 키울수가 없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하늘이다. 그래서 하늘을 자주 보는 사람은 쉽게 죄를 짓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을 검증할 수는 없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공자도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종종 억울한 일을 당할 땐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항변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힘들고 피곤할 때는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 하늘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이다.

사람들은 가을을 가리켜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봄 하늘 역시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꽃잎이 날리는 모습은 한편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현실에 코를 박고 사느라 하늘을 잊고 사는 당신, 잠시 바쁜 일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어떨런지?…………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면 마음이 확 트이고 생각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게될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하늘을 명명할땐 주로 ‘한울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님’은 존경을 표시하는 접미사로서 고려조 이래로 천지신명을 호칭할때에는 ‘님’을 붙여 ‘한울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늘을 인격화 한 것이다. 또한 한울은 ‘한’과 ‘울’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말해 “큰 울타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이라는 큰 울타리를 배경으로 서로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수있다.

물론 언어학자의 말에 의하면 하늘의 ‘늘’은 ‘언제나’, ‘항상’ 그러하다는 뜻으로 영원성, 불변성, 항구성을 표상하는 말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하늘을 옛날에는 한자로 한(韓). 환(丸). 환(桓)으로 표하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동녘에 해가 뜨면 천지가 환(煥)하다는 뜻에서 비롯된 유사음(類似音)이다. 우리민족을 한민족(韓民族) 이라 한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자 ~ 이제는 다시 새로운 봄의 계절이 시작되는 3월달이 되었다. 창문을 열고 스마트폰도 잠시 꺼두고, 파란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자.

그러면 잃어버리고 살았던 뭔가가 울컥 하고 목울대를 타고 넘어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발견할지 도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단 하늘을 자주 올려다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하늘의 심오한 메시지를 듣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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