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무너지는 황혼부부 사랑

<김명열칼럼> 무너지는 황혼부부 사랑

 

지금, 세계적인 경제적 침체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부부간의 이혼율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경제적인 압박과 궁핍, 서로간의 성격차이, 상대 배우자의 부정 등등의 수많은 이유와 사연, 사정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평생을 동거동락하며 죽는 날까지 같이 살기로 약속한 부부는 이렇게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헤어지고 이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한국의 예를 보자면, 젊은부부 5쌍이 결혼 한 후 2쌍이 이혼을 한다는 놀라운 사례가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젊은 부부 외에도 다양한 연령층 대에서 많은 부부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갈라선다고 한다. 2018년도 세계적인 이혼 추세를 보면 선진국인 미국이 인구 1천명당 5.2%가 이혼을 하고 일본은 2.7%, 한국은 3.5%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모든 나라 세계 각국 공히 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무척이나 많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에서 그 추세가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에서 황혼 이혼을 택한 50세이상 비율이 10년전에 비해 3배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이혼을 하더라도 살아갈 날이 많다는 인식이 한 몫 하고 있다. 아내는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남편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습관에 젖어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는 아내의 헌신적인 인내로 부부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이제는 그 많은 희생을 아내들이 감수하지 않겠다고 한다.

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부부간에도 같이 있을 때는 잘 모른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까운 사이, 밥그릇에 밥을 같이 비벼먹고 같은 컵에 입을 대고 마셔도 괜찮은 사이가 부부사이다. 사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잃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프고 애련한 일은 없다. 그것이 부부일 때 더욱 그러하다. 젊은 시절엔 사랑하기 위해서 살고, 나이들면 살기위해 사랑한다. 부부란 젊은 시절엔 연인이고 중년엔 친구이며 늙어서는 서로가 간호사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너 없이 못 살겠다”고 매달리다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아웅다웅하는 것이 부부다. 부부간의 사랑도 그렇게 변한다.

몇년전 강원도 두메산골, 국유림 관리소에 한 할머니가 와 있었다. “할머니 드디어 끝났네요. 여기 영수증요” 영수증을 받아든 할머니의 눈 가에 눈물이 맺혔다. 126만 3000원, 그것은 죽은 영감이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산불을 낸 죄로 나라에서 물린 변상금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시름시름 앓던 영감이 병석에 눕게 되었고, 임종시 그 빛을 할머니에게 떠 맡겼다. “임자 나대신 좀 갚아주구료. 얘들한테 암 말 말구” 할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영감대신 빛을 갚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영감의 유언 때문에 자식들에게는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 5000원도 갚고 3만원도 갚는 달도 있었다.

그렇게 영감이 세상을 떠난지 20년만에야 그 빚을 다 갚았다. 그날 할머니는 소주 한병과 영수증을 품에 안고 영감의 묘를 찾았다. “영감 저 왔어요. 이제 벌금 빛 다 갚았네요. 내가 못나서 당신 약속 지키는데 20년이 걸렸지 뭐유”.

참다운 부부애란 가난이나 시련이나 환란이 온다 할지라도 파괴될 수 없는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어느 양로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17세때 시집와서 애를 못 낳는다고 구박끝에 쫓겨난 82세 할머니가 오래전부터 양로원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할아버지 한분이 입원했는데, 늙어 있어도 50년전 그때 같이 10여년간 살았던 그 남편의 모습이 아닌가. 치매에 걸린채 간혹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데, 임종직전 “서로간의 나쁜 인연을 풀어라 내가 마지막 가는 순간 그래도 당신이 옆에 있어주어서 감사하다” 고…………이것이 부부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부부의 참 사랑이란 평생 익는 과일과 같은 것이다.

남편들이 늙어가면서 초라해지는 것은 변화에 민감한 아내와 달리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해야 살아남는다.

변화하는 가정에는 위기가 없다. 그곳에는 행복이 있다. 근래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결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의 통계조사에서 남자들 43.6%가 하고 싶은 편이라고 답했다. 여자들 34.8%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남편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진 셈이다. 일본에서도 퇴직하여 나이든 남편을 오찌 누레바(젖은 낙엽) 라고 한다. 아내한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는 뜻이다. 은퇴가 남편들에게는 재앙이요, 아내들에게는 해방이고 자유라고 한다. 부부는 유리그릇 같아서 심하게 부딪치면 깨어지지만 조심조심 사용하면 변하지 않고 평생 간다. 부부는 마주보는 거울과 같다. 내가 사랑하고 이해하고 아끼고 배려하면 상대도 그렇게 하는 것이 부부 사이다. 젊음은 찰나일 뿐 결국 늙고 병든 육신만 남아 고독한 인생여정이 이어진다. 늙고 병들면 자식도 무용지물, 결국 곁에 있어줄 사람은 아내와 남편뿐이다.

아침 수평선 위 붉고 황홀한 젊음의 사랑보다 서쪽 하늘을 오색으로 물들이는 저녘노을 같은 황혼의 부부사랑이 더 격조가 높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좋은 아내를 얻은 남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사람은 보석같은 아내를 얻은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은 하늘같은 남편을 만난 사람이다. 부부가 만나는 인연이라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하고 거룩하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정된 섭리와 뜻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법망 경에 이르기를 부부의 인연은 칠천겁 인연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천생 연분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 겁이란 일천여년에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는 시간을 말한다. 그 무한한 칠천겁의 천년 인연으로 만난 보석같은 아내이고 남편은 하늘같은 존재이다. 성경말씀에 이르시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뼈와 같은, 내 살과 같은 존재이기에 한 몸이 되어 존귀하고 거룩히 여긴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여자를 만드실 때 머리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를 지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발로 만들지 않은 것은 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고, 늑골(갈비뼈)로 만든 것은 ‘그녀가 언제나 그의 가슴 가까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였다.

인간의 만남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부부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우리 조상들은 ‘부부로 살아가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소중하게 가꾸어왔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오직 가정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자기 희생의 표본이다. 남편의 외도로 눈 밖에 났어도 자신의 운명인양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며느리로써,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삶을 살다 간 어머니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사회를 이끌어온 근간이었지만 시대적 변화는 가정의 뿌리였던 인내와 순종, 자기 희생의 어머니 상은 사라지고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만이 가정을 지키고 있다. 인격체이기에 자기 희생이 용서되지 않고, 인내가 자존심의 상처가 되고, 순종은 바보들의 못난 짓이기에 이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용기이고, 자기 존재의 가치 발견으로 변화되고 있다.

남성은 인내와 이해로 아내를 감싸주는 아량은 없이 여자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남성우월주의가 아직도 한국의 남성주의 사회에 팽배해 있다. 남편이 아내를 감싸주기라도 하면 얼빠진 놈으로 취급받았던 우리네 전통사회………. 언제부터인가 여성은 무조건 순종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여성은 스스로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다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부터 사회는 급격히 변화해가고 있다. 완충작용없이 하루아침에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감을 인식하면서, 이제 부부란 공동체의식에서 벗어나 한 인격과 인격이 같은 지붕밑에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만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물적 짝짓기와 별반 다름없는게 오늘날의 현대세대에서 느끼게 되는 부부간의 만남이다. 물론 모든 젊은 세대의 부부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보, 당신, 남편이나 아내의 호칭은 찾아볼 수 없고, 오빠와 살지 않으면 누나(연상의 부인)와 살고, 자기야 와 살고, 너, 나 하며 친구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오늘날 젊은 세대의 부부상이다. 상대를 인격적으로 존경하거나 신뢰하기 보다는 언제든 싫으면 헤어질 수 있다는 마음이 내면에 깔려있다 보니 사는 것 자체가 장난과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뜻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쉽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래서 한국이 요즘 이혼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중의 하나가 되었다.

부부란 서로가 상대를 존중하고 인격체로 대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오직 상대가 자신을 존중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게 남자다운 듯 착각하는 이 땅의 몇몇 남성들, 남편의 흉을 들추어 씹어내야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남이 인정해 주리라는 착각속에 살고 있는 어리석은 아내들이 주위에 보면 많이 있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부부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부부가 서로 성격이 맞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잘못을 용서하는 세월의 구비마다 아프고 괴로운 상처를 가슴에 묻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부부란 이 지구상의 가장 소중한 만남이다. 모든 만남이 부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 만남이 소중히 가꾸어질 때 이세상의 모든 만남이 좋은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지며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내 몸보다 더 사랑하는 자식들도 내 배우자(남편,아내)와는 비교될 수 없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해도 자기 가정을 꾸리고 나면 부모는 이미 마음으로 한 발 멀어지기 마련이다. 자식들의 가정 평화를 위해서도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효자 자식 열명보다 악처가 낫다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부부는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좋은 일,나쁜 일 함께 겪다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닮아가 종내는 한 사람인 듯 편안해 진다. 말 안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되고 이해가 되고 웬만한 것은 용서가 된다. 마주 보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돌봐줘야 하고 보살핌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부부인 것이다. 세상을 끝내고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 까지 같이 살고 함께 동고동락 할수있는 사람이 부부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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