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성지순례기행문23

김명열기자의성지순례기행문23

요르단 (Jordan)

(지난주에 이어짐)

20세기 초까지 요르단은 현재 대부분 이스라엘 영토인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상지중 하나로, 요르단강 서안의 고고학적 유물은 BC 9000년전의 것들까지 있다. BC 3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는 가나안인들과 아모리트인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그들 다음에는 수메르(Sumer)와 아카드(Akkad)의 왕인 사르곤의 군대가 들어 왔다.

BC 1800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목민들을 이끌고 가나안 산맥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현재의 이스라엘과 대충 일치한다. BC 1023년 이스라엘인들은 사울과 다윗이 이끈 왕국을 형성했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수도로 정했으나, 거칠 것 없이 영토를 확장하던 로마는 BC 63년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헤롯왕이나 빌라도 총독을 비롯한 여러 집정관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 지역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서 설교하던 것은 이 당시로 믿어지고 있다. 칼라귤라 밑에서 점점 미쳐가던 로마는 일련의 유대인 발란을 촉발하였으며 몇년간 지속된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팔레스티아주가 선포되었다. 이 패배는 유대인 국가의 종말을 고했으며 세계 각지로 유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AD 331년 코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예전에 불법적이던 이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갑자기 모두가 성지와 예수님의 무덤이나 탄생지 등을 포함한 많은 건물 등에 대해 알고 싶어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나라를 지배한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638년 예루살렘은 오마르(Omar)왕에게 함락당하여 모하메드가 성전의 꼭대기에서 천국에 오른 이슬람의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되었다. 기독교 세계는 이러한 것에 반대하여 십자군을 조직했고1099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닥치는대로 살육하며 거의 100여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년의 기독교-이슬람교의 다툼 끝에 1187년 이슬람의 손으로 다시 넘어갔고, 이슬람의 맘룩 왕조는 1291년 마지막 십자군 성채를 함락시켰다. 이후 500년간 팔레스타인은 매우 조용했다.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이 나라의 지배권은 단조롭고 규칙적으로 옮겨갔지만 결국은 오토만 제국의 지배로 결말을 맞게 되었다.

많은 사막의 요르단 인들은 이런 변화를 피해 베두인의 성채에 남았다. 오토만 제국이 세계 1차대전 이후 무너지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압둘라 왕의 지배하에 트란스요르단 (Transjordan)을 만들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아랍인과 유태인은 서로 전쟁을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전쟁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동안 트란스 요르단은 강 서안과 예루살렘 일부를

점령하고 국가명을 요르단으로 고쳤다. 1953년 후세인 왕이 즉위하면서 요르단은 관광산업과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이 강 서안과 예루살렘의 반을 다시 차지함으로써 요르단에 싹트기 시작한 관광산업을 망쳤다. 6일 전쟁동안 요르단은 돈벌이가 될만한 땅들과 농지를 잃고 대신에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수천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난민인구의 PLO세력은 후세인 왕의 권력을 위협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되어 급진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레바논으로 넘어갔다. 1955년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경제 장벽을 없애고 안전과 수자원을 공급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들로 하여금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자기들끼리 이권을 챙김으로써 자신들은 지역에서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낳게 하였다. 동시에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국가 평의회 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 와의 연계도 강화하여 협정을 맺으려 노력했다.

최근 요르단은 1991년 걸프 전쟁으로 중단된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관계를 정상화 하였다. 후세인 왕은 민주주의로 요르단을 이끌기 시작했으며 이슬람 행동노선(무슬림 브라더 후두와도 연계를 맺고 있으며 상당히 원리주의적인 정책을 가진)은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정당이 되었지만 1999년 후세인 왕이 죽자 장남인 압둘라 2세 왕자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현재 요르단 국왕이다. 참고로 요르단에 대해 설명을 드리자면 요르단 남부 홍해 동쪽끝에 자리 잡은 아카바(Aqaba)를 빼놓을 수 없다.

아카바는 요르단에서 유일하게 해상으로 통하는 길목이자 특별 경제구역이다.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간 중요한 해상 무역로이며 1965년부터 국제공항과 호텔이 건설되면서 국제적인 관광도시가 되었다. 원래 아카바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땅이었다.

1965년 요르단 정부는 사막 일부를 내어주고 12Km의 해안선을 얻었다. 내륙인 요르단에서 아카바의 가치는 무한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건네준 땅에서는 이후 석유가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득이 날아간 셈이라고 혹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요르단은 꼭 필요한 물을 얻었고, 홍해를 통해 인도양으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모를 일이다.

다음의 여행 기행문을 설명 드리기 전에 잠시 시간을 빌어서 성도간의 나누는 사랑과 온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다음 페이지로 옮겨가겠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교회당(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여 교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주님 안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사랑의 가족들이다. 또 아울러 이 믿음의 형제, 자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서로 간에 사랑을 나누고 아끼며 존중하고 신뢰속에 아름다운 교제를 하여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신자 삶이란, 위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말하며 아래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 서로간의 사귐을 뜻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나 모임이든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그 사회나 모임을 지탱하는 두가지 큰 윤리적 토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눔과 섬김이다. 교회의 예배를 말할 때 엄격히 따져 얘기를 한다면, 사회적 측면에서 본다면 ‘부름받은 자들의 집회’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든 간에 사회적 집합체임에 틀림이 없다. 사회적 집합체의 구성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특히 교회는 일반의 사회 구성원들과는 엄연히 그 목적이나 모임의 취지가 다르다.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바탕 아래서 이루어진 사랑의 집성체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유일 신을 믿는 하나님의 성전이고 믿음의 형제들의 집합체이다. 때문에 주 안에서 마음도 하나가 되고 사랑도 하나가 되어 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고 또 상대가 가진 것을 나누어 가지며 서로간의 기쁨과 온정을 나누는 사교장이기도 하다.

성지순례 여행을 위해 이역만리 멀리 이곳을 찾아온 우리들 일행, 우리 모두가 앞서 말한 대로 주님안에서 형제이고 자매이다.

교회를 떠나서 이곳에서 여행을 하다 보니, 성지와 역사적 유적지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매일 매일이 주일이고 예배시간이다. 교회에서는 다소 서로간에 교제를 깊게 나누지 못했던 성도들도 이곳에서는 모두가 끈끈한 인간애와 친밀도가 가까워져 준비해온 과자나 간식, 과일 등등을 나눠 먹으며 정담을 나누고 신앙적 간증을 들으며 믿음의 성을 공고히 구축해 나갔다. 누가 권고해서 나누는 교제도 아니고, 강요해서 준비해온 다과류를 내놓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주고 받는 사랑과 베품, 나눔속에 믿음이 싹트고 사랑이 성장했다. 모두가 이번의 순례 여행을 “참 잘왔다”고 만족해하며 즐거워한다.

사실 이곳에 오기전에는 우여곡절도 많았고, 참여인원도 많지 않아서 어느때는 성지순례 여행 그 자체를 취소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성지순례여행을 직접 주선하고 인도해온 나로서는 난감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와주셔서 이렇게 성원이 되어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성지와 유적지를 방문하고 둘러보게 되어 정말로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가 저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모습들이 일찍이 교회생활 어느 때도 보지 못했던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이제 이곳을 모두 순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올지는 모르지만, 모두가 다시 오기는 힘들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여행은 너무나 알차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고 말들을 한다. 순례 여행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같이 식사하고 같이 공동체가 되어 믿음을 공유하며 서로간 더욱더 가까워진 마음과 사랑에 이번 여행에 의미를 더 뜻 깊게 한다.

요르단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다음 여정지까지 3~4시간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각자가 갖고 있던 다과와 과일, 음식 등을 나누며 웃고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우리들 일행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생애에 커다란 획을 그어준 얍복강을 지나고 있었다.

 

얍복강.

얍복강은 구약의 대표적 인물인 야곱의 생애 결정적 사건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장소이다.

얍복은 ‘흐름’이라는 뜻이다. 아랍어 이름은 자르키(Zarqa)인데 그 의미는 ‘푸른 강’이다. 얍복강은 트렌스 요르단, 즉 요단강 동편에 있는 요단강 지류로서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에 있다.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전 천사와 씨름한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얻은 브니엘이 있는 곳이다(창세기 32:23~30). 야곱의 가족들이 건넌 지점은 얍복 나루라고 기록되었다(창 32:22). 얍복 나루는 건널 수 있는 여울을 뜻하며 브니엘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중 요단강 동편을 정복한 두 지파 반이 머무르던 길르앗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르논 강에서 얍복강에 이르는 영토를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에서 빼앗았다(민수기 21:24).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과 암몬자손의 경계선을 아얍복강으로보았다(수12:2). 얍복강은 와디 자르카(Wadi Za_ zarqa)와 동일시 된다. 와디 자르카는 요단계곡의 중요한 네개의 와디중의 하나이다. 얍복강은 성경과 관련된 중요한곳들을 지나는 강이다. 랍바(암만), 마하나임, 로드밤, 브느엘, 사르단, 아담을 지나 요단강과 연결되며 이 강의 길이는 100Km에 이른다.

이 얍복강을 신학적 의미로 살펴볼 것 같으면,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신앙적 정체성과 고백, 삶의 방향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이름을 짓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 중도에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 삶의 방향이나 운명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신적 개입에 의한 개명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방향을 변화시켜 가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차원에서 얍복강을 하나님의 신적 개입에 의한 한 사람의 운명이 바뀐 중요한 장소와도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야곱이 이름을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로 바꿔주신다. 이는 자기의 잔 꾀를 의지하며 살았던 야곱이 아닌 하나님과 겨루어 승리하는 이스라엘의 삶으로 하나님이 친히 바꾸어 주신 것을 볼 수 있다.<다음주에 계속>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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