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기자의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기행문14>

예루살렘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지 역사 사적지 이야기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도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 산재해 있는 예수님 시대의 역사적 발자취와 흔적들을 소개하며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다.

베드로 통곡 교회(닭 울기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통곡한 장소)

베드로 통곡교회는 시온산의 남쪽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선 성전산과 감란산이 잘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교회는 예수님에 잡히시던 그날 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에 뒤에 따라온 베드로가 죽음의 공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후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는 말씀(마 26:69~75, 막 14:66~72, 눅 22:54~62)에 근거하여 세워진 교회다.

“그가 저주하여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전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4~75)”. 불과 몇시간 전에 예수를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쉽게 꺾이기 쉬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이 교회를 여기 세운 목적도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교회가 자리 잡은 터는 가야바의 집터(법정)로 알려진 장소이며, 457년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세워졌다가 이스람에 의해 파괴된 후에 1934년 프랑스의 아숨쉬옹 수도회에 의해 현재의 교회가 세워졌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한 후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교회 이름을 라틴어로 Galicantu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는 ‘닭이 울었다’는 뜻으로 한편으로는 ‘닭 울음 교회’라고도 하는데, 통상 베드로 통곡 기념교회로 알려져 있다.

교회의 맨 꼭대기에는 닭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의 스테인드 그라스와 내부 벽 색깔이 무척 아름다운데 초대 교황이었던 베드로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교회내부에는 가야바의 법정 자리가 일부 남아있고, 지하에는 예수님 시대에 만들어진 물 저장소와 죄수들을 감금한 후 매질을 가했던 동굴감옥도 그대로 발굴되어있다. 동굴 천정에는 법정으로 통하는 큰 구멍이이 뚫려있는데 죄수를 심문할 때 묶어서 끌어올렸던 구멍이라 한다. 이 모두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들이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갇혔던 감방으로 여겨지는 곳의 벽에 예수님의 형체로 여겨지는 사람 모양의 형체가 찍혀있다는 사실이다. 수도회에서는 이곳을 거룩한 동굴(Sacred Pit)이라 하며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언덕 길(비아 돌로로사,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길)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로 불리는 이 길은 원래 ‘아픔의 길’ 혹은 ‘슬픔의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몸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을 오르신 것이다. 그리고는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순례자들을 위한 이 ‘십자가의 길’은 1294년 리칼두스 신부에 의해 대략 위치가 정해졌다고 하는데, 그후 1540년경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지금의 코스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당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과는 실제적으로 다를 수도 있으나, 이 길을 걷는 우리들에게는 무한한 감동과 의미를 안겨주었다. 이 길은 예수님께는 고난의 길이고 슬픔의 길이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생명의 길이었고 구원의 길이었다.

이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의 전 과정을 모두 14 지점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순례자들은 각 지점을 통과할 때 마다 발을 멈추고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특히 가이드 안내를 맡은 전병규 선교사님의 리얼한 상황 설명과 역사적 사실 이야기는 직접 그 당시 현지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 체험의 학습을 연출해주었다.

여기에 그 14곳(처의) 지점 이야기를 소개하여 드리겠다.

<제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선고받으신 곳. <2처> 십자형을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 <3처> 십자가를 지고가다 처음 넘어지신 곳. <4처>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만난 곳. <5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6처>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준 곳. <7처>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넘어지신 곳. <8처> 예수님께서 우는 여인들을 위로하신 곳. <9처> 예수님께서 세번째로 넘어지신 곳. <10처>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곳. <11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 <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곳. <13처> 운명하신 예수님을 땅에 내린 곳. <14처> 예수님의 사체를 무덤속에 장사지낸 곳.

우리 일행 순례자들은 전병규 선교사님의 안내와 인도를 받아 십자가를 직접 메고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 행진하며 올라갔는데, 그때 그 당시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체험하며 가슴속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들 일행이 비어 돌로로사를 찾았을 때 기대와는 전혀 상반된,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도때기시장속 같은 혼란의 길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시야속으로들어 왔다. 지저분한, 아주 옛날 역사속의 시내 좁은 길, 그 양편으로 밀집하여 각종 상점들이 줄지어서 들어서 있고, 물건을 팔려고 떠드는 상인들이 순례자들과 엉켜서 밀고 밀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시장판이어서 조용히 묵상하며, 주님을 생각하며 걷는 순례의 행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이 그렇게 꿈속에 걸어보고 싶은, 예수님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고난속의 인류구원의 역사의 길 이었던가?. 실망과 허탈함속에 바쁘게 떠밀리다시피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곧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이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난장판의 비아 돌로로사는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이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이 세상이 깨끗하고 죄악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성자같다면 예수님께서는 구태여 이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 죄악으로 점철된 이 세상,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 길을 걸어보자. 나는 주변에 시선을 빼앗기면 집중력을 잃어 감동이 반감될까봐 열심히 앞만 바라보며 가파른 언덕길을 집사람과 손을 꼭 잡고 찬송과 기도를 마음속으로 드리며 발걸음을 각 처소마다 들러보며 옮겨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셨고, 또한 머지않아서는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실 것이다. 비아 돌로로사,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은 결국 영광스런 승리의 길인 것을……….. 우리일행 순레단은 예수님께서 안토니오 요새에 있었던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좁고 좁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마지막 숨을 거두신 성묘교회까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거룩하게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숭고하고 위대한 희생과 사랑의 마음과 뜻을 기리며 엄숙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길 순례의 발걸음을 마쳤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예수님의 무덤위에 세워진 섬묘교회다.

성묘교회(골고다 언덕, 예수님의 무덤위에 세운 교회)

성묘교회(Church of Sepulchre)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첫번째로 가보고싶어하는 성지중의 성지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의 현장,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골고다언덕과 그 무덤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성묘교회가 자리잡은 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비아 돌로로사의 종착점으로 골고다언덕 전체가 성묘교회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묘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보존되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찾아와 기도하는 장소로 여겼다. 그런데 주후 135년경 로마 통치시대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알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고, 동시에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골고다언덕위에 비너스신전을 세웠다. 이후 200여년이 지나 역사는 반전돼 로마 코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자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찾고자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 비너스 신전이 세워진 것을 확인하고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부탁하여 비너스 신전을 파괴하고 서기 336년 이 장소에 성묘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성묘교회는 서기 614년경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후 모데스토스라는 사제에 의해 재건되었었는데 1009년경에는 또다시 회교군주 칼리프 하켐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것을 알고 격노한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연합하여 십자군을 결성, 성지 예루살렘을 회교도 손에서 되찾고자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1096년부터 약 200년간 동서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1149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며 그 후 여러번에 걸친 개축과 보수가 이어져 오늘날까지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1291년 아랍의 패권자였던 살라딘은 십자군과 싸워 그들을 이곳 성지에서 몰아내고 성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성묘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대신에 이 교회를 장악했다는 뜻으로 교회를 들어가는 두개의 문중에서 하나를 돌로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대문에 열쇠는 이슬람측에 맡겼다. 이때부터 오늘날 까지 700년동안 성묘교회는 한개의 문만 사용하고, 그 문의 열쇠는 지금도 이슬람교 측이 소유하고 있다. 현재의 교회 내부는 그리스정교, 로마 카톨릭, 콥틱교회, 시리아정교, 알메니아교회, 에디오피아교회 들이 각각 분할해서 관리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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