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죽음을 생각하며………………………..

<김명열칼럼>  죽음을 생각하며………………………..

 

나이가 들어 늙고 보니 몸은 많이 쇠약해졌고, 정신도 희미해져 조금 전에 행했던 일도 기억 못하고, 머리는 어지럼증, 두통, 게다가 치아는 온통 충치로 이빨 전체가 아프고 흔들리니, 소화도 잘 안되고, 몸 전체의 기능이 부실하다보니, 이렇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날 것 같습니다.

요즘 보면 내주위의 연세 드신 어른들,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고 있다”며 자신의 몸은 종합병원이라고 칭하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최근 2,3년 동안 나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 및 친구 4명이 유명을 달리하고 세상을 떠나갔다. 그중에 한 친구는 시카고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로서, 내가 시카고에 올라갔을 때 식사를 나누며 다음에 만날 때는 “맛있는 맛집에 가서 음식을 대접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몇달사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평소에 무척이나 활동적이고 건강해보였던 그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 이렇게 나의 주위에서 하나 둘씩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어느 듯 나에게도 죽음이란 두 글자가 머리속에 맴돌며 떠나지를 않고 있다. 특히 나이를 먹고 노년기에 접어든 인생 황혼녘의 노인들은 항상 죽음이라는 단어가 잠재된 의식속에 생활속에서 함께 자리 잡고 두려움과 공포속에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게 되어있다. 또한 죽음에는 지위나 빈부의 차이가 없다. 의학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 수는 있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오늘은 죽음을 생각하며 글을 써 보았다. 사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것을 금기시하고 기피한다. 죽음을 나와 관계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나의 삶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고 죽음은 아주 기나긴 길의 머나먼 끝에서나 일어날 어떤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 자신들의 태도 속에는 어떤 무의식의 오만이 깃들여져있다. 남들은 늙고 병이 들고 또 어떤이는 죽어가고 있으며, 이미 죽었겠지만,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고(또는 젊으며), 그런 죽음의 문제들은 언젠가 때가되면 잘 대처할 것이라는 무의식적 오만함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 인생 삶의 끝부분에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보다 젊어 보이고 보다 건강하며 활달하고 생기 있게 보이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인다. 흰머리 검게 염색하기, 주름살 펴는 시술, 젊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옷을 골라 입기 등등, 늙는다는 신호가 조금만 느껴지면 사람들은 이를 피하려고 무엇이든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체는 병들고 결국은 죽는다. 살아있을 때 우리는 돈, 보석, 자동차, 좋아하는 것들, 직업, 사랑하는 사람 등의 많은 것에 집착을 하지만 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들을 가져갈 수 없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지독한 집착은 “나”라고 하는 자아의 집착이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자아의 집착뿐 아니라 생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 혹은 견고하게 쌓아놓은 자의식 까지도 소멸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말하지만, 종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고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죽음은 피할 수 없음으로 이를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하다. 생명권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므로 자살은 인정되지 않으며, 마지막 행복이 존엄사에 있으므로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한다.

우리는 너와 나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생명도 유한한 존재며 일정한 과정일 뿐이다. 쇼펜 하우어는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고 했고, 토마스 만이 묘사한 것처럼 “무덤으로 가는길”이다. 인간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죽음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 즉 자연의 싸이클을 의미한다. 빅토르 위고는 “인간이란 모두 집행기일이 확정되지 아니한 사형수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계속 불로장생을 꿈꿔왔다. 현대인들 또한 의학발전에 힘입어 노화방지에 많은 관심을 기우리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사는 길은 없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남은시간을 의미있게 사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다. 죽음은 자연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며, 노년에 절대고독에 시달리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주어진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누구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모두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머리 속에 내재되어 살아가고 있다. 떄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린다. 그리스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극복”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에대한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원초적 공포”라고 한다. 특히 노년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절대고독에 빠지게 된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라는 생각과 내세에 대한 무지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슬픔으로 인도한다. 임종과정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거부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다가 마침내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죽음은 자연 순환의 과정일 뿐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수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불안과 고독과 고통이 따른다. 철학은 이성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종교는 사후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자연법칙으로 피해갈 수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텍쥐페리는 “죽음이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하면 쉽게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진리로 인식하고 수용해야 죽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며,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될수 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우리는 정든 가족이나 지인, 친구 등의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저세상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은 불시에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는 죽음을 준비하고 이별하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야한다.

보를레르는 “사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흔히들 급사하는 것이 통증을 느끼지 않고 갈 수 있고,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음으로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조병화 시인의 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인이 머무는 곳은 항상 가숙(假宿)이 었다. 노 시인은 언제나 고독속에 갇혀 살아왔고, 영원한 안식처를 찾기 위해 준비를 해왔을 것이다. 그러한 고독이 바로 이 시인의 시의 모태였으며, 현실과 이상을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이별하는 방법을 익히고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며 사는 인생은 귀하고 아름답다. 이것이 자아 완성으로 가는 길위에서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 이렇게 되면 살면서 생각하면서 죽음의 결론 점에 다다른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언제 죽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것으로 생각하고 현재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라고 하였다. 이는 죽음의 문제를 미리 해결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라는 경구로 받아들이면 된다. 헤르만 헷세는 “죽음이란 저기 또는 여기에 있지 아니하고 모든 길 위에 있다. 너와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들어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 죽음을 말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닥쳐왔을 때 비로써 죽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로서 참된 삶의 길을 벗어날 때 의미 있는 삶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가치는 정신적 생명인 꿈과 희망과 사랑에 있다. 꿈과 희망을 잃고 사랑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 정신이 건강해야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젊음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없다. 나이가 들면서 꿈을 잃거나 희망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꿈을 잃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으로 인생의 끝자락까지 꿈은 간직하고 살아야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 “좀더 빛을” 외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간 괴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항상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내면에 스며드는 죽음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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