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나의 할아버지와 독립운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나의 할아버지와 독립운동

파란과 격동의 세월…구한말(韓末)의 아픔

운정(雲庭) 윤효정(尹孝定)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매년 3.1 독립기념일이 찾아오면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작고하신 윤효정(尹孝定) 조부님을 되새기며 구한말 무너져 가는 대한제국을 지키려는 조부님의 애국심을 재조명 해 본다.

 

제 할아버님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정(雲庭). 아명은 사성(士成)이며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1858.(철종 9)~1939.) 조선 말기의 문신,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민족계몽가, 언론인, 교육자로 슬하에 5남 1녀를 두셨다.

외동딸 정원(貞媛)은 한국의 신여성으로 일본 동경음대와 메이지대학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또 최초 유럽 여자 유학생이다. 이후 관립 한성고녀(현 경기여고)의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왕실 황후의 가정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일 합방으로 나라가 강점되자 모든 걸 내려놓고 191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을 하여 독립운동과 교육에 일생을 바치시고 지내셨지만 이후 연락이 두절되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밑으로 5형제는 일제치하에서 공부를 시킬 수 없다고 하여 직접 집에서 한학과 가정학습을 가르치며 신문물과 지식을 일깨우시며 자율하였다.

모든 독립지사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가세가 기울고 온갖 핍박에도 꿋꿋이 명문 가문을 이어 가면서 다섯 아들을 어렵게 가르치면서 일제에 대항해 꿋꿋이 지탱해 오셨지만 끝내 대한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셨다.

할아버님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많은 문서에 잘 나와 있지만 그 활동사항을 언급하여 보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탁지부주사(현 기획재정부 사무관급)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교육에 뜻을 같이 하신 분들 중에 박영효(朴泳孝), 우범선(禹範善) 등과 함께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당시 우리 대한제국의유학생을 수용하시며 신학문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그가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살해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민족 개화에 앞장서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발기하여 활동하시다 기호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융희학교와 병합하여 초대교장(현 중앙고교)을 역임하는 등 교육과 민족 계몽에 앞장서며 국내 정치활동도 활발히 준비하셨다. 1905년 이준(李準),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으로 정치활동과 계몽에 헌신하며 대한제국의 기초에 충실하게 헌신하였다.

또한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며 한나라의 초석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 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강제 해산 당하였다.

이에 장지연(張志淵),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대한 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실질적인 홍보를 하는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 “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민족혼을 일깨워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규탄, 공격하며 대한제국의 당위성에 매진하셨다.

1908년에는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우뚝 성장하였다. 또한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모든 활동을 일본에 의해 중단 당한채 창신동에 숨어 사셨다.

이후 1919년 3.1운동 전까지 33인의 민족지사(당시엔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됨)들과 뜻을 같이하며 모든 거사를 함께 하시고도 본인은 어떤 종교에도 입문이 되지 않아(여러 종파에서 가입을 권유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고 전해짐) 후견인으로 그들에게 각인, 기록되어 남았지만 그 후 일본 경찰의 시달림과 추적의 눈을 피해 서울 창신동, 청운동, 강원도 철원으로 옮겼고, 또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55칸 고택본가로 피신, 이사하시고 돌아가실 때 까지 그곳에서 글을 쓰시며 지내셨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현재 적십자사와 비슷한 중국의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헌신하기도 했다.

1939년 그토록 바라시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82세의 나이로 노정객이며 독립운동가, 교육자, 계몽운동가의 일생을 마감하셨다.

지난 2010년에는 가문에 보관되어 내려오던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를 가형들이 상의하여 시대에 맞게 한글로 번역하여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번역)”를 출간해 모든 국민이 그 당시 백성의 모습을 읽고 느끼며 대한제국의 흥망성쇠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숭고한 애국심과 민족을 위한 계몽으로 타협하지 않고 일생을 사시며 가문의 영광을 이루셨지만 실제 직계 자손들의 고충은 지금까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의 자부심만 간직하고 어려운 삶을 영위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할아버님의 유언대로 “그 시대에는 누구나 다 독립운동을 하며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며 나서지 말라”는 말씀을 받들며 오늘도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우리고 있다.

끝으로 독립유공자로 투철한 애국심으로 헌신하면서 겸손하게 삶을 유지하셨던 선친의 영전에 삼가 이글을 올린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국사편찬위원회, 1965)

KBS 역사 스페셜 방송(2010), 민족문화 대백과사전(2015)

윤상근(고려대 플로리다주 교우회장)  <1156/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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