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20회>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독일의 롬멜 장군

 

<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20회>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독일의 롬멜 장군

 

(지난주에 이어서 롬멜장군 기사 이어짐)

 

롬멜장군은 1941년 리비아에서 패배 일보직전에 처한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위해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파견을 가서, 전차 및 탱크부대의 전격 전술에도 뛰어났지만 결정적으로 기만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은 보급이 열악하고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전쟁에서 규칙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것을 찾아내 실행하는 일 뿐이다’라는 말처럼 승리를 이끌어냈다.

북아프리카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곳이며 그가 가장 큰 공을 세운 무대가 되었으며 동시에 월등히 우수한 적에게 패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롬멜은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친 부대를 철수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히틀러는 무시하고 무리하게 카이로와 수에즈운하 공격명령을 내렸다. 결국 롬멜이 이끄는 독일-이탈리아 동맹군은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영국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피로와 질병으로 약해진 롬멜은 몽고메리의 연이은 공격에 패하여 튀니지까지 후퇴하였다. 1944년 독일의 패색이 점점 명백해지고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서유럽에서 ‘대서양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롬멜은 동-서진영에서 연합군을 상대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서방측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의 침입을 막아야한다 했지만, 히틀러의 노여움만 사게 되었다. 히틀러는 과도 약물복용으로 비현실적 명령을 내리고, 지휘관들의 조언도 듣지 않았다. 조국을 구하고자한 군인들은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기에 이르렀고, 롬멜의 높은 명성이 필요했던 그들은 롬멜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롬멜은 이들의 청을 묵인한다. 결국 이 사건이 발각되어 롬멜이 암살 미수사건에 관련되어 처벌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고 권총자살을 한다. 롬멜은 사망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민족의 영웅과 악마라는 칭호를 동시에 듣고 있으며 전 세계의 군인들이 존경하는 세계적인 명장이다.

이상으로 대충 세계 제2차대전의 이모저모를 간략하게 소개하여드렸다. 어쨋거나 전쟁은 인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주고, 그 후유증은 전쟁이 끝난지 몇십년이 지났어도 그 상흔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우리 여행객들 일행은 전쟁의 본거지였던 독일을 뒤로 하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대명사를 갖고 있는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그 주변이 너무나 아름답고 전원적인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높은 산등성이 사이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뭉개구름 사이로 펼쳐지는 산천과 목가적인 풍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높은산의 목야지에는 한 여름동안 풀어놓은 소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경사진 산비탈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소들은 여름내내 이곳 산속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목동들과 함께 지내다가 찬바람이 부는 가을철이 되면 자기 주인이 살고 있는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온다. 그때는 퓌 샤이트 라는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알프스 목동들의 전통문화가 담긴 소몰이 축제를 의미하는데, 알마트립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이 축제는 여름내내 방목했던 소들을 추워지기 전 월동준비를 위해 집(소 주인에게) 으로 돌아오게 하는 축제이다. 소들은 약 4개월여 동안 산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산속에서 방목되어 자연속에서 자란 소들은, 인공사료를 먹지 않고 자라서 오염도 되지 않았음은 물론 산속의 약초나 고랭지의 풀들을 먹고 자라서 육질이 부드럽고 연한 고기 맛을 제공해준다고 한다. 소고기 맛은 한우보다 몇배 더 맛있고 부드러우며 맛이 좋다고 한다. 며칠후 어느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소고기 맛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실 말 듣던 대로 고기 맛이 정말로 좋았고 부드러우며 육감이 최고였다.

육회로 먹어도 전혀 나무랄데 없는 세계 최고급의 소고기였다.

연푸른 녹색의 대지속 자연은 어느새 청년의 계절 여름이 되었다. 이 여름이란 친구가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가서, 내가 가는 길목에 멋진 진초록과 풍성함으로 채색을 하며 바쁜 발걸음으로 7월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숲속 나무 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속으로 나의일상을 날려 보내는 듯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벗어나 중력을 벗어버린 시간속에 드러나는 나 자신의 자태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너무 가벼워지면 내 삶이 날아가 버릴 것 같고, 비현실적이며 무의미해진다. 이 11박12일의 짧지도 않고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여행의 가벼움을, 매일같이 새롭게 대하는 이국의 여러 가지 풍물과 멋진 풍경속에 움추러들었던 삶의 족쇄를 풀고 느슨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분명 삶은 무겁지만 그 무게가 우리의 삶을 더 치열하고 진실하게 해준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길은 오밀조밀한 협곡을 지나면서 알프스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는 들어오는 입구부터 너무나 아름답다. 저 멀리 보이는 터널과 산 자락을 파고 뚫어놓은 길은 마치 여인의 아련한 속치마처럼 안개가 중턱에 걸쳐 뭉개구름과 함께 바람에 날리며 운무를 이루고 있다. 어느때는 험준한 산악지형을 오르느라 관광버스는 숨이 찬 듯 기진맥진 하더니 어느 새 길은 시야가 확 트이며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된다. 완만한 내리막에서 여행객들은 차 안에서 울려져 나오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왈츠음악의 운율에 맞춰 어깨춤이 절로 나며 기분은 절정에 다다른다. 알프스의 꿈결 같은 경치와, 중세 유럽의 품격과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땅,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가 되었던 곳, 요한 슈트라우스와 모자르트, 하이든 같은 음악가가 태어나고 활동하던 곳이 바로 지금 내가 땅을 밟고 달리고 있는 오스트리아다.

지금은 영세 중립국이지만 인류가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전쟁인 1,2차 세계대전을 모두 잉태한 땅도 오스트리아다. 오스트리아에 나고 자란 히틀러가 빈에서 미술학교를 다닐무렵, 레닌이 이곳에서 활동했고 그 얼마후 스탈린이 혁명의 영감을 얻으며 꿈을 키우고 있었던, 억센 기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인들은 일찍이 1세기때 이곳에 성루를 건설했다. 북쪽의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자 로마인들은 도나우 강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이 진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여 오늘날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결국 게르만족에게 무너지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자부하며 프랑크왕국에서 분리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수백년에 걸쳐 경쟁을 한다. 지금은 유럽 중앙의 작은 나라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시절 프랑스 서쪽으로부터 발칸반도와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었다.

오스트리아는 인구 8백여만명이 살고있으며,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이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해있어 여러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스위스, 리히덴슈타인, 북쪽으로는 독일, 체코, 동쪽으로는 항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가 있다. 스위스 쪽은 알프스산맥과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중 하나로 1인당 GDP가 높다.

시민들을 위하여 수준 높은 복지를 제공하는 나라다. 수도 빈(비엔나)은 수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 회원국이 되었으며, 1995년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경제협력기구(OCED)의 창립국이다. 또한 1995년 솅겐조약을 체결, 1999년 유로화 사용을 시작하였다.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근원은 합스부르크 왕가시대로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제국에 비해 17, 18세기 유럽 강대국중의 하나였다.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제국 성립을 선포하자 이에 대항하여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제국을 수립하였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9개의 연방주로 이루어진 대표 민주주의 실현 국가이다. 이 나라의 수도는 가장 큰 도시이며 인구가 170여만명이 살고있는 빈 (비엔나)이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다음주에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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